天眞菴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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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皇 요한-바오로 2세 神學]의 地平線을 바라보며

[敎皇 요한-바오로 2세 神學]의 드넓은 地平線을 바라보며,,.

Leo Magnus, Gregorius Magnus, Albertus Magnus, 같은 교황들을 [大敎皇]이라고 높여 부르듯이, 복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을, 벌써부터, 해외 일부 교회 매스컴에서는, 종종 [大敎皇 요한-바오로 2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어른의 110 여회가 넘는 [해외 지역교회 방문의 사목활동] 면에서뿐 아니라, [성사 전례 거행, 등의 윤리신학적]인 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지평선을 알리고, 가르치고, 몸소 실행하시므로서, 천주교회 영역을 명실 공히 만민의 천주교회로, 특히, 평신도들의 자격과 위치를 성직자들 못지않게 들어높히신 업적이 至大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천주교회는 그 現場이 되고, 그 材料가 되고, 그 敎材가 되는 選拔된 聖恩을 입었다.

① 103위 중에, 92명의 [평신도 同時 시성]은, 그동안 극소수 한두명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諡聖史에 실로 천지개벽의 충격이었다. 성직자들이나 수녀들이 살고 일하는 성당이나 수도원 못지않게, 평신도들의 가정과 직장이, 모두 [성인되는 학교]이며, 가정생활과 직장 업무가 모두 [성인되는 학과목]임을 밝히셨다. 천주대전에서 성직자나 수도자의 자격과 위치와 대우의 그 意味와 價値와 敎訓에 있어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의 차별을 업무기능]정도로만 좁히셨다(?)고 할까, 적어도 천주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아주 큰 걸음을 내딛게 하였다.

② 또한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던 시성식을 103위의 生長鄕이며, 생활 현장이고, 목숨을 제물로 바친, 피로 물든 刑場, [한국 땅을 로마 베드로대성당의 제단]으로 삼아, 현장에 오셔서 시성하시므로서, 전 세계가 모두 로마와 동급의 장소로 쓰일 수 있음을 알리셨다. 한마디로, 천주대전에서 그 意味와 價値와 敎訓에 있어서, [로마를 세계화]하였고, [세계를 로마화]하였다.

③ 특히,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성직자나 선교사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교회를 세운 [天眞菴 聖地를 한국천주교회 發祥地]로, 친필 서명하신 문서로까지 선언하시므로서, [우리나라를 聖地 이스라엘 못지 않은 거룩한 땅]으로 알려 주셨다. 전 세계에 천주교 發祥地는 2곳뿐이니, 베들레헴이 있는 이스라엘과, 천진암이 있는 대한민국 뿐이다. 그 외 다른 나라 천주교회는 모두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복자 요한바오로 2세는 전임자 교황들의 전승을 따라, 이를 극구 격찬하셨다.

④ 더욱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목숨을 바치며, 교회를 세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만 한다고, 공식 선언하심으로써, 우리나라 평신도들, 특히, 아직 물로 세례를 받기 이전,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복음선포활동의 교회적인 가치]를 인정하시고, 들어 높이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일부 신자들은 세례를 받아야 신자가 되고, 세례 받은 신자들이 있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 세계 어떤 나라 천주교회도, 세례성사 거행을 근거로 하여, 그나라 교회의 元年으로 삼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가까운 일본 천주교회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가 가고시마에 첫 발을 딛고 상륙한 1549년 8월 15일을 일본 교회의 출발로 하고 있다.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의 도착을 그 지역 교회의 출발로 삼는다.

⑤ 普遍敎會(Ecclisia Universalis)든, 地域敎會(Ecclesia Localis)든, 교회는 세례성사 거행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교회가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관리하는 하느님 백성의 단체이니, 교회는 세례성사보다 先在하고, 先行하는 主體로서, 세례를 포함한 7성사로 더욱 발전하는 것이다. 교회 存立의 출발은 신앙인들의 [복음 선포]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패가 갈라져 말 많고, 싸우고 있던 코린토 신자들에게 아주 강학 어조로 말씀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너희들에게 보내신 것이, 너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라고 보내신 줄로 아느냐? 아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내셨느니라.] (코린토 전서, 1장 17절).

⑥ 더욱이, 세례를 받아야 천주교 신자가 되는 줄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거꾸로, 천주교 신자라야 세례 성사를 받는 것이다. 천주교신자가 아닌, 무당이나 무신론 공산당원은 세례를 받지도 않지만, 받아도 무효다. 그래서, 사제가 세례를 정식으로 집행하기 전에, 세례성사를 받으려는 사람이 천주교신자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점검, 확인하고 있다. 즉, "당신은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등".

⑦ 또 세례는 3가지 있으니, 水洗와 血洗와 火洗다. 水洗는 일반적으로 물로 씻으며 받는 세례이고, 血洗는 순교로 피 흘려 받는 세례이며, 火洗는 수세나 혈세를 받을 기회가 없는 경우, 불같은 熱望으로 받는 세례이니, 열망으로 화세를 받은 이들은, 기회가 올 때, 수세나 혈세를 받음으로서 열망으로 받은 火洗를 보완하고 입증하게 된다. Daveluy 주교는 물론 黃嗣永 진사도 帛書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얼마나 세례성사 받기를 열망하였는지 밝히고 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 이벽성조께서는 몇 차례나 북경에 사람을 보내어도 결과가 없자, 마침내 이승훈 진사를 이벽성조의 대리자로, 또 조선시도들의 대표자로 북경에 파견하여, 눈길 3천리를 걸어가 세례를 받고 오게 하므로서, 이승훈 진사의 귀국 후, 모두 水洗를 받았고, 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殉敎하므로써 血洗까지 받았다. 2000년 전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이처럼 火洗와 水洗와 血洗까지 다 받은 이들이 어디 있으랴!
Msgr. Byon

참고 원문:

Mgr.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 martyrs en Coree. Vol IV. manuscript copies, 1-2면 :“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e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erences de Ni Pieki”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a la religion dans ce royaum de Coree fut Ni Pieki appelle Tektso et surnomme par luime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 Kieng Tsiou.”
“Kouen Ambroise, T'siel sini etait l'aine de la famille des Kouen que Ni Pieki choisit pour en faire le fondement de la religion dans ce pays”
“Seng houni ecouta d'un air soumis ces paroles de Pieki qui le penetraient profondement et les recevant comme la parole du Maitre, il promit de faire tous ses efforts pour realiser leurs communs desirs.”

黃嗣永 帛書 -李承薰 李檗大奇之 檗曰 北京有天主堂 天主堂有西洋西士傳敎者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李承薰 如其言,,,)

Extrait d'une lettre de Mr Maubant miss. Ap. en Coree a Mr Langlois Superieur du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eres Yangtchi 3 Xbre 1838.<자료수집 발굴확인: 최승룡 신부): "[…]Nous avons pu cette annee nous procurer secretement des notes manuscrites sur l'e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ee. Elles differents peu de celles que j'avais composees d'apres la tradition orale,,,,,En 1720 la 58e annee du fameux Kanghi, un autre ambassadeur Coreen nomme Y eut une entrevue avec les Missres. de Pekin et recut d'eux des livres Chretinne qu‘il emporta en Coree. Un nomme Koang, qui recut le surnom de Jean, ayant lu ces livres, eut le bonneur de sentir et de gouter les verites qu’ils renfermaient. Il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elytes il envoya en 1783 a Peking un autre delegue egalemant nomme Y,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c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e, sous le nom de Pierre[…]"


Writer : 천진암   Date : 2012-03-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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