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강학 장소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분들은, 1994년에 처음 소개한,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의 첫머리 30여면의 내용에 대한 현장 검증확인 기사(참고-I)와, 정약용 선생 전집의, 天眞消搖集(참고-II)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강학에 관하여 가장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 것은 위의 역사서이다. 또한, 蔓川遺稿 跋文에 나오는, 三十餘年이, 天眞消搖集 詩句에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만천유고 발문도 천진소요집이 쓰여지던, 1827년 경임을 알 수 있고, 모두 정약용 선생의 저술임이 확인된다.
* 특히, 天眞消搖集에서 學淵, 石泉翁, 載宏, 등의 몇몇 이름이 나오지만, 대부분이 정약용 선생 자신의 詩文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그 내용이 정약용 선생 한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三十餘年이 두 번씩이나 나오지만, 아들 學淵이 두 살 때를 회고하며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진암에 와서 말년에 정약용 선생이 아들과 친구들 이름으로 시를 지어 남긴 것인데, 1827년 정해년 박해가 일어나던 때라서, 부득히 그렇게 썼다고 본다.
참고. -I- 最初의 講學 場所가 天眞菴이라는 史實의 再確認
-[이달의 천진암] 통권 제11호,1994년 5월 5일 자 2면과 3면-
學者 權哲身 主導의 講學場所인 절을 찾아가는 李檗先生이 「길을 잘못들은 것(trompe de chemin-달레의 저술)」이 아니라, 「절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trompe de pagode-다블뤼의 기록)」이다.
韓國天主敎會 創立史에 관한 샤를르 달레 神父의 「韓國天主敎會史」著述 內容과 다블뤼 主敎의 「備忘錄」記錄內容의 對照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
한국천주교회 創立에 관한 역사 기록 중에, 天眞菴 講學會 개최에 대한 프랑스 선교사 샤를르 달레 신부의 「韓國天主敎會史」 저술 내용이, 그 原本 資料가 되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原本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講學 場所 糾明에 있어, 다블뤼 주교의「備忘錄」 내용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니, 이를 現場地理와 對照할 때, 講學 場所는 天眞菴일 수 밖에 없다는 結論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음이 불가피함을 後代 學徒들을 위하여 여기에 일부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한국에 한번도 와보지도 않은 샤를르 달레 신부가 편술한 것으로 되어 있는 「韓國 天主敎會史」에 나오는, 한국천주교회 初期 學者들의 講學會 場所에 관하여, 필자는 이미 1990년에 아래와 같은 글을 발표하면서, 結論으로서, 달레 신부의 著述일부가 잘못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지적하며 주장한 바 있었으니, 한마디로 講學會 場所에 관한 달레의 저술 중 일부가 다산의 기록과 현장 地形에 대조 할 때, 著述이 틀렸지, 地形이 틀릴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었다. 그런데, 그 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와 있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이것이 달레 신부가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 原稿의 原本資料임은 두말할 필요없이 역사관계자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에 나오는 동일 부분의 문장들을 달레 신부의 저서 내용과 대조 비교하여 본 결과, 필자의 主張과 結論이 정확하였었음이 확인되었다. 이제 1991년 1월호 「司牧」誌 제144호(83면 참조)에 실렸던 글의 일부를 여기에 그대로 다시 한번 더 옮겨서 되읽어 본 후, 샤를르 달레 신부의 저술내용 원본과 번역문,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 기록 원본(필기체)과 인쇄체문, 그리고 번역문을 모두 소개한 후, 이에 대한 내용 분석과 함께, 現場 地理에 대조한 바를 논증한 필자의 해석과 주장이 명확히 확증되었음을 밝히는 바, 이는 매우 기쁜 일이고, 또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기에 이하에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달레의 기록에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광주산맥과 한강 일대의 지형상 맞지 않는다. 다만 이벽 선생이 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학 장소를 찾아 가는 것이고, 강학은 장소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인물이 하는 것인데, 그 당시 강학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인물은 권철신과 정약전이니, 이들이 머무는 곳이 주어사였다면 분명 이벽선생은 주어사를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전은 자기 집에서 주어사보다는 천진암이 더 가기 쉬운 평탄한 길이고, 또 동생 정약용과 천진암을 방문했던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녹암이 주어사에 우거할 때(혹은 정약전도 녹암과 주어사에 함께 우거할 때이든 간에) 강학 장소로 알고 믿고 있던 이벽 선생이 찾아가는 곳은 주어사였으나, 강학은 그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뜻밖에도 산너머 천진암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달레의 기록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강학 장소를 잘못 찾아갔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무리가 없다. (「한국천주교회 창립-1779년인가 1784년인가-」변기영 신부. 1991년 1월호「司牧」지 144호 78면-83면 참조)
이상의 글에서 筆者는 이미 달레 神父의 著述內容一部가 現場 地理와 맞지 않는 部分이 있음을 指摘하는 同時에, 겨울 밤 雪中에 講學이 열리고 있는 場所, 즉 山 속에 있다는 절간을 찾아가는 曠菴 李檗 先生이「길을 잘못 들었다」는 表現은 講學 場所, 즉 「절을 잘못 알고 찾아갔다」는 表現으로 알아 들어야만 한다고 主張하였는데, 1990년도 가을에 이 글을 쓸 당시는, 필자가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얻어 보기 전이었다. 즉, 달레신부의 기록을 천진암 주변 지리와 대조해보고, 다산의 기록과 비교 대조해 본 결과, 달레의 저술이 잘못된 것이므로,「달레의 기록에 이벽선생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광주산맥과 한강 일대의 지형상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결국 달레의 기록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는 표현은 강학이 개최 되고 있다는 장소인 “절을 잘못 알고 갔었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무리가 없다」고 필자는 결론하였었다. 그런데 이하에서 보는바와 같이, 달레 신부가 다블뤼 주교의 기록을 옮겨서 재저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부 내용을 뜯어 고쳤음이 밝혀졌다. 즉,「절이 틀렸다(trompe de pagode)」는 다블뤼의 기록을,「길이 틀렸다(trompe de chemin)」라는 말로 달레가 말을 바꾸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사실 이것은 고친 것이 아니라 망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에 와서 20여년간이나 근무하고 있던 다블뤼는,「강학회를 하고 있는 절」을 찾아나선 이벽이 절을 틀리게 알고서 다른 절로 찾아 갔다. 즉「절이 틀렸다{trompe de pagode}」고 기록하였는데, 수십년 후, 프랑스에서 이 기록을 가지고「조선천주교회사」를 써나가던 달레는 프랑스 독자들을 위하여 다블뤼의 문장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이를 가지고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절로 갔다”즉「길이 틀렸다(trompe de chemin)」고 옮겨쓴 것이 이번 조사 대조 결과 확인된 것이다. 물론 프랑스 독자들에게 “길이 틀렸다”는 말이나,“절이 틀렸다”는 말이나 비슷한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겠지만, 강학장소, 즉 절의 이름을 규명하려는 우리에게는, 天眞菴과 走魚寺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아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기회에 한국천주교회사 관계자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다블뤼의 비망록과 달레의 저술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져오고 있는 최초의 강학에 관한 외국자료가 되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국내 자료 중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온 다산의 묘지명에서 거론되는 최초의 강학장소에 관하여, 달레서가 말하고 있는 2개 장소의 이름이 다산이 말하고 있는 天眞菴과 走魚寺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권철신을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는 강학 장소로 알고 이벽선생이 밤중에 눈길을 헤치며 찾아간 첫번째 절에는 강학도 없었고, 있어야할 권철신도 없어서, 스님들을 깨워 쇠지팡이를 짚고 큰산을 넘어가서 두번째 장소에서 권철신과 학자들을 만나서 함께 강학를 하였다는데, 허탕을 친 첫번째 절이 2개 장소 중에 어느 곳이었느냐에 따라 실제로 강학이 있었던 곳, 즉 실제로 강학이 개최되고 있던 곳이 확실하게 밝혀지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벽선생은, 강학회가 권철신의 주재로 천진암에서 개최되고 있다고 믿고, 천진암을 우선 찾아갔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그 이유는 그 당시 강학의 주임강사이며 주동 인물인 권철신은 큰 산맥을 경계로 자기 집 쪽에 가까이 있는 주어사에 머물던 학자이며(寓居走魚寺 - 茶山의 기록), 특히, 정약전도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러 찾아가 뵙던 시기이므로, 대학자 권철신이 참석하며 주관의 강학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이 찾아가는 절은 우선 走魚寺일 수 밖에 없고, 한 겨울 눈속에서 밤중에 走魚寺를 찾아간다고 가던 이벽선생이 길을 잘못들어서 天眞菴으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그 높은 앵자산을 넘어 가서야 주어사에 도착하여 함께 강학을 하였다는 주장을 국내 일부 학자들은 지난 20여년가까이 해오면서,「녹암 권철신이 전에 일찌기 기해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 주어사에서 설중인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에 도착하여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淡經 - 茶山의 기록)」는 문장에서 講學于天眞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을 하였었는데, 그 이유 중에 주요한 해외문헌으로서 달레의 기록 즉, 강학이 개최되고 있다는 절을 찾아가는 이벽이 길을 잘못들어서(trompe de chemin) 다른 절로 가게 되었었다고 기술한 달레의 저 기록을 글자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산의 국내 기록, 즉 講學于天眞菴이라는 문장과 앵자산 주위의 지리와 지형에 모든 기록을 현장대조시키며, 수차례 답사하며 조사해본 결과 달레의 저서기록이 틀릴 수 밖에 없으니, 강학은 실제로 天眞菴에서 개최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던 이벽 선생은 권철신이 머물던 走魚寺에서 학자들이 강학을 하고 있으련 하고, 즉 강학하고 있는 절을 주어사로 잘못 알고 떠났기 때문에, 길은 제대로 주어사 가는 길로 갔으나, 절은 강학하고 있는 절이 아니었으니, 다른 말로 말하면 절이 틀렸다는 사실을 필자는 주장해왔던 것이다. 결국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에 과도히 치중하다보면 현장상황을 소홀히 하기 쉬운데, 새로운 문헌자료가 나오면 종래의 주장을 바꾸거나 수정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현장 지형 조사와 연구를 위주로 하여 이루어진 주장이나 결론은,“山川은 依舊하다”는 말의 뜻과 같이, 산맥과 강줄기처럼 바뀌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결국 어떤 事件에 관한 여러 문헌들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서, 記述은 틀릴 수 있어도, 사건이 일어난 地形은 바뀌거나 틀릴 수가 없다. 이제 달레 神父가 著述한「韓國天主敎會史」원문과 번역문 그리고, 그 內容의 原本資料가 되는 다블뤼 주교의 備忘錄 原文과 飜譯文을 대조해보자. (우편3면의 다불뤼 주교 필기체 원문은 이하에 인쇄체로 게재 참조)
다블뤼 주교의 記錄 내용을 달레 신부가 옮겨 적으면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종종 내용이나 表現의 變質, 添削 敍述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강학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도 그러한 差異点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달레의 기록과 다블뤼의 기록이 다른 경우, 다블뤼의 기록을 더 중요시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천주교회 초기 학자들의 강학회 개최에 관한 다블뤼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보자.
1. 1777년(정유년)에 당시 저명한 학자 권철신과 정약전 등이 어느 고요한 절(pagode)에서 강학회를 하고 있었다. 2. 이벽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자신도 그들의 강학회에 함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 울이라서 길마다 눈이 쌓였지만, 100여리나 되는 그곳을 향하여 즉시 길을 떠났다.
3. 그리하여 이벽은 해가 졌는데도 피곤을 모르고 걸었고, 極難하고(difficiles) 險惡한(ardus) 길(chemins)을 걸어서 子正무렵에서야 어떤 절(pagode)에 도착하였다.
4. 그런데 권철신 일행은 그 절에서 강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즉 강학 장소인 절을 잘못 알고(trompe de pagode) 찾아간 것이었다.
5. 예상 외로 강학이 열리고 있는 곳은 그 큰 산 반대쪽이었다.
6. 그래서 스님들(les bonzes)을 깨워, 쇠지팡이를 짚고, 눈을 헤치며 그 큰산을 넘어가서, 마침내 山中心에 있는(dans le sein des montagnes) 외딸고(isole) 폐허가 되어 쓸 수 없는 흉가집으로 버려진(perdu) 건물(edifice)에 이르자, 그곳의 居住者(les habitants)이 놀랐으며, 거기서 이벽선생은 그들과 함께 10여 일간 강학회를 하였다.
이상의 줄거리를 당시 생활환경 속에서 관계인물과 지형 등에 대조시키며 검토하여 볼 필요가 있다. 즉 종이 위에 그려진 몇 글자 기록에서 나와서, 20여년 전 시대로 올라가 한강상류 광주산맥 현장으로 옮겨가보자.
1) 200여년 전 조선인들은 대부분 모두 걸어서 다녔고 부유층에서나 말을 타고 다니며 생활하였으므로, 각자 자기 고장의 주변의 길을 잘 알고 있었다.
2) 특히 이벽선생(講學會 당시 26세)은 천진암과 주어사가 있는 앵자산이 바라보이는 두미에 거주하며 살고 있었으므로, 그 周邊의 名山과 寺刹들 가는 길, 특히 당시 저명한 대학자 권철신이 머무는 곳 주변의 길들을 잘 알만한 나이의 지성인이었다. 심지어 험난하지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까지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당시 사회의 생활 여건상 상식적인 이야기다.
3) 또 두미에서 약1km내외 떨어진 바로 강 건너 마재에 있는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 집이 누님(강학 당시 29세) 집이었고, 종종 누님댁에 들릴 수 있었던 이벽선생은 이 고장 주변의 지리와 도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밤중인데도, 더욱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chemins impraticables-달레의 표현) 험한 지름길까지도 택할 수 있었다. 4) 더욱이 정약용과 정약전, 즉 이벽선생의 사돈들은 어려서 일찍부터 이벽선생을 추종하면서 지내던 사이었다(嘗從李檗 - 茶山의 기록).
5) 저들은 천진암 계곡 입구가 되는 退村, 分院, 馬峴, 斗米, 花郞坊등 소내 지역에 관한 詩들을 지었으니, 이벽선생이 天眞菴 가는 길과 走魚寺 가는 길을 몰라서, 여주군의 “走魚寺로 간다는 것”이 광주군의 “天眞菴으로 갔다”고 할 수는 없다. 젊은 선비들이 마치 정거장처럼 자주 들러 가는 마재에서 走魚寺는 양근 쪽, 동쪽으로 가게 되고, 천진암은 퇴촌 쪽, 즉 남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6) 이벽 선생이 첫번째 절에 도착하는 시간이 밤중이라면 적어도 오후부터 출발한 것이고, 따라서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등지고 가게 되기 때문에 두 절의 방향과 거리와 晝中步行 시각과 深夜倒着 시각으로 보아, 첫번째 도착한 절을 천진암으로 보기에는, 너무 가까워 무리가 있으나, 주어사라고 하면 매우 합리적이고 상황에 부합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7) 강학의 주동인물이며 어른은 권철신이고, 당시 권철신이 머무는 절이 권철신의 집에서 가까운 주어사였으니(寓居走魚寺 - 茶山의 기록), 이벽선생이 찾아가는 절은 우선 주어사일 수 밖에 없다. 8) 강학이 열리고 있는 것으로 듣고 찾아 나서서 첫번째 도착하는 절은 100여리가 넘는 거리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식 거리 추정 표현으로 마재 양근을 거쳐서 가는 주어사라야 더 타당하지, 천진암은 비교적 보다 가까운 거리이므로 강학이 열리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절은 주어사일 수 밖에 없다. 또 이벽선생이 평양이나 강릉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서울 수표동이나 광주 두미에서 마재를 거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지리와 당시의 도로 사정이다.
9) 특히 강학이 있는 절을 찾아 나선 이벽선생이 첫번째 절에까지 이르는 여행기술에 있어, “극난하고 험악한 길들(chemins difficiles et ardus)"을 통과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반 통행로가 아닌 지름길로서, 단순히 겨울에 눈쌓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길 자체가 험하고 거칠다는 뜻으로, 천진암에 이르는 길은 고개도 없는 평탄한 길이며, 16대째 살아오는 이들이 늘 다니면서 연결된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도로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천진암에 이르는 도로 기술일 수는 없으며, 주어사로 가는 길에만 해당성이 있고, 또 사실에 부합이 되는 표현이다.
10) 즉 주어사로 가는 길은 양근을 거쳐서 가더라도 세월리 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고, 빨리 가기 위해서 직선 길인 동오리와 항금리를 거쳐 주어재로 가면 더 험한 고개들을 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주어재 길, 바로 이 길이 다블뤼의 기록과 가장 부합되는 길이다. 즉 양근과 세월리를 거쳐 정상적인 길로 가다가 밤은 깊어가고, 가기는 가야하겠으므로, 중간에 지름길을 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벽선생이 도착한 첫번째 절은 이 험로를 지나서 가게 되는 주어사일 수밖에 없다.
11)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한문이나 한글로 된 어떤 문헌을 앞에 놓고서 불어로 번역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 것인데, 우선 시작부터 ( )안에 “정유”년 표시라고 한 것이 그렇고, 이하에 참고로 제시하는 용어나 귀절이 어떤 기록으로 된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쓰는 듯한 느낌과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寺에는 大雄殿이 있고, 庵에는 大雄殿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寺에서는 佛供, 法會 등 衆生들의 行事性을 띤 佛供禮節이 爲主이지만, 庵에서는 고요히 參禪, 講學, 등을 하는 高僧들이나 學者들의 修道와 硏究, 讀書, 등을 爲主로 한다. 그래서 庵子란 修道나 修學하는 道人들의 居處에 불과한 곳이므로, 큰 바위(庵)나 풀(菴)로 가리워져, 그저 비바람이나 피하는 居處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다블뤼의 프랑스어 기록에서도 마치 走魚寺의 寺와 天眞菴의 菴을 구별지어 표현하려는 듯, 처음부터 거론하여 써 오던「절(寺)」이라는 단어를 첫 번째 도착하는 장소까지는 그대로「절(pagode)」이라고 같은 단어만을 3차례나 계속 써오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강학 장소에 대해서는「절(寺pagode)」이라는 단어 사용을 갑자기 중단하고, 그냥「施設物(edifice)」이라고 했는데, 달레는 이를 居處(demeure)라는 유사한 의미의 단어로 바꾸어 쓰므로서, 첫 번째 도착한 절(寺)과 두 번째 도착한 암자(庵子)를 그 기능과 용도와 표현 면에서 구별하여 표시라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에 와서 꽤 오래 머물던 선교사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만 지나쳐버리기에는 좀 어딘가 모르게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다블뤼 주교의 위 글에서 단순히 동일한 단어 즉「절(pagode)」이라는 단어를 너무 여러 번 째(4번째)사용하는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4번째 끝에 와서는「건축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별문제가 아니지만, 두 곳 불교 기관이나 건물의 등급이나 종류나 용도나 기능을 구별짓는 원어 즉, 寺와 庵을 표현해보려고 한 것이었다면, 이 역시 두 번째 도착한 곳에 대한 표현은 天眞菴에 더 해당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2) 또 첫 번째 도착한 절에서는 모든 “스님들(les bonzes)”을 깨워 함께 큰 산을 넘어 갔다고 하고나서, 두번째 도착한 곳에 대하여는 단순히 건물이라는 표현에다가 그곳에 “거하는 자들(les habitants)”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표현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 “건물에 머물던 스님들과 강학회에 모인 학자들”이라는 자연스러운 기술이 아닌, 구별을 느끼게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니,「寺(pagode)와 庵(edifice)」, 그리고「스님들(bonzes)과 거하는 자들(habitants)」같은 이질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山의 中心(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isole) 떨어져 있는데다가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흉가집 같은 폐찰(perdu) 건축물(edifice)이라는 표현역시, 앵자산 서북쪽 중심계곡에 하나밖에 없었던 암자인 天眞菴은 외딴 암자로서 오래된 헌 건물로서 폐찰이 되다시피 한 곳이었으니, 얼마 후 다산 정약용이 천진암을 방문하여 읊은 詩에서, “天眞菴에 와보니 寺破無舊, 즉 절은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 하였는데, 당시 저명한 권철신의 신분과 지위로 보아, 이러한 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鹿菴 權哲身이 寓居 走魚寺”하던 시대였으므로, 이벽 선생이 산을 넘어 찾아간 절간은 천진암일 수밖에 없다.
또한 주어사는 앵자산 동쪽의 오른쪽 날개 계곡에 있었으므로, [山의 中心에]라고 말하기에는 천진암보다 덜 적합하며, 또 주어사가 있던 같은 동편 계곡에는 鳳台庵, 日出庵, 石伊庵, 白年庵 등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300m내외)에 있었으므로, 주어사를 조용한(tranquille, calm) 곳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아주 외딴(isole et perdu) 곳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주어사보다 천진암에 더 부합하는 記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산에 있는 모든 절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들이기는 하지만, 내용과 주제는 물론 특히 기록자인 다블뤼주교가 일반적인 수필가가 아닐 뿐더러 역사의식이 철저한 정밀표현의 필치를 가진 선교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표현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餘韻을 부정할 수 없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14) 이 외에도 호랑이 굴 등, 여러 가지 記述面을 현장과 대조해 볼 때, 다블뤼는 마재와 앵자산, 천진암과 주어사 터 등을 답사하였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답사하지 않고 그렇게 기술하기가 힘들 뿐더러, 원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본에서 그 정도로 그렇게 쓰여져 있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과 현장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을 대조 비교함에 있어서, 혹자는, A자료니, B자료니, C자료니, D자료니, 호칭하여 상호 대조하는데 있어, 상이한 점 때문에 맞는다, 안 맞는다, 하는데, 모든 자료가 각각 완벽하지 않아서, 마치, 예수의 생애 중 어떤 동일한 사건에 관한 4복음서의 기술이 상이하듯, 또 그렇다고 4복음이 다 틀리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듯, 부분 부분이 상이한 안 맞는 것을 안 맞는 면에 대조하니 안 맞을 수밖에 없고, 또 안 맞아야만 하는 것이니, 이런 점을 내세워 부분을 전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모든 자료는 相互補完的인 면을 내포하고 있음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여간 이곳에 대한 현장체험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달레는 프랑스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다블뤼의 문장을 손질하면서, 아마 별 관심 없이,「절이 틀렸다」는 다블뤼 주교의 역사가적인 표현으로 된 기록을 가지고,「길이 틀렸다」고 넓은 의미에서 大同小異한 일반적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으나, 이것이 강학회에 참석하는 이벽선생의 열성과 고생에 대한 大義面에서는 그 말이 그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강학장소로 거론되고 있는 2개의 장소, 즉 천진암과 주어사 중에 澤一糾明이라는 狹義面에서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 20여 년간 살던 사람의 기록을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이 고친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면에서 망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百聞而不如一見이다.
결국 이상의 비교연구 검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달레가 저술한「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오는 교회 초기 학자들의 강학이 개최되었던 절은 천진암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달레의 기록을 뒤집는 다블뤼의 기록이 나왔는데도, 종래의 동일한 주장 즉, 이벽선생이「길을 잘못들어서」라는 달레의 저술만을 따라, “천진암으로 먼저 갔다가 주어사로 갔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확실한 새 자료가 나오면 옛 자료에 근거한 잘못된 주장은 반드시 새롭게 바로잡아져야 하겠다.
따라서 李檗先生은, 「길을 잘못 들어서(달레)」가 아니고, 「절을 잘못알고 있어서(다블뤼)」, 險한 지름길을 통하여, 雪中에 權哲身이 寓居하던 走魚寺를 거쳐서 鶯子山을 넘어 天眞菴에 도착하여 學者들과 함께 講學會를 하였음이 明確하다.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 茶山의 記錄).
(지금까지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이라는 茶山公의 文脈에 대하여 그 時代 사람들은 한 가지 의미로 알아들었던 것을 지금에 와서 현대인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200여 년 전 우리나라 學者들의 語文慣習, 특히 茶山의 많은 著書 속에 나오는 類似한 表現의 文體들을 列擧하면서, 그 한 가지 의미의 뜻을 다음 번 기회에 論述키로 하겠다. 天眞菴 講學會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 특히 丁若鏞의 文獻과 丁學術의 記錄 및 다블뤼의 記錄 등 모든 기록들이 서로 背馳되지 않고 一致하고 있을 뿐더러, 오히려 相互補完的이라는 사실이다.)
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원문과 번역문
C'etait en l'annee 1777 (ti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e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er ensmble a des etudes profondes. Ni Pieki l'ayant appis en fut rempli de joie et heureux de pouvoir profiter des le??ons de ces hommes remarquables il prend de suite son parti d'aller les trouver. C'etait l'hiver. La neige couvrait partout les routes et la distance etait de plus de cent lys: mais de pareils obstacles etaient loin de pouvoir arreter ce coeur ardent et si avide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art de suite a travers ces chemins difficiles et ardus il ne sent pas la fatigue. Le jour tombant ne peut le determiner a retarder la realisation de ses desirs et continuant sa route de nuit il parvint enfin a une pagode vers minuit. Quel n'est pas son desappo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e de pagode et qu'il fallait aller de l'autre cote de la montagne. Sans se decourager il pousse sa pointe. C'est une enorme montagne qu'il faut franchir de nuit. Elle est couverte de monceaux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en defendant les abords. N'importe! Pieke fait lever tous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A la main il prend un baton ferre pour se defendre des attaques des sauvages ennemis et poursuivant sa route a travers les epaisses tenebres. il arriva enfin au lieu si desire. Une arrivee si eteange re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edifice isole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On ne pouvait se figurer quel motif amenait a une heure si indue des hotes si nombroux: mais bientot tout s'etant eclairci la joie le bonheur succederent a la crainte et dans les epanchements suggeres par une rencontre si heureuse on s'appercut a peine que dejia le jour avait point. Pendant plus de dix jours que dura cette reunion, on approfondit toutes les doutes et les opinions des anciens furent mis sur le tapis. De la,,,,,,
때는 1777년(정유),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그밖에 학문을 좋아하고 학구적인 여러 양반들을 데리고 함께 깊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한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이 기쁨에 넘쳤고, 또 그 유명한 사람들의 강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었다. 눈이 곳곳의 길을 덮었고, 거리도 10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들이 그렇게도 학문과 지혜를 열망하고 탐내는 그의 마음을 저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떠났고, 길들이 힘들고 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을 몰랐다. 또 해가 저문 것도 그의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절이 틀렸고, 또 그 산의 다른 편으로 가야 함을 알았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길을 단호히 계속하였다. 그가 밤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으로, 눈더미로 덮여 있었고, 많은 호랑이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상관없다! 벽은 모든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해 그는 손에 쇠방망이를 들고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그렇게 바라던 장소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이상한 도착은 산속에 외따로 파묻혀 있는 그 건물의 거주자들에게 두려움을 퍼뜨렸다. 무슨 이유가 이렇듯 많은 손님들을 때아닌 이런 시각에 오게 하였는지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져, 공포가 기쁨과 행복으로 변했고, 이렇듯 다행한 만남으로 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벌써 날이 샌 것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Dallet 신부의 「韓國天主敎會史」원문과 번역문
En I'annee tieng-iou(1777), le celebre docteur Kouen Tsiel-sin-i, accompagne de Tieng Iak-tsien-i et de plusieurs autres nobles desireux d'acquerir la science, s'etait rendu dans une pagode isolee pour s'y livrer avec eux, sans obstable, a des etudes approfondies. Piek-i, l'ayant appris, en fut rempli de joie, et forma aussitot resolution d'aller se joindre a plus de cent lys de distance. Mais ces difficultes ne pouvaient arreter un coeur aussi ardent. Il part a I'instant meme, il s'avance resolument par des chemins impraticables. La nuit le surprend a une petite distance du but de son voyage. Il ne peut se determiner a attendre plus longtemps, et continuant sa route, arrive enfin vers minuit a une pagode. Quel n'est pas, alors, son desappoi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e de chemin, et que la pagode qu'il cherche est situee sur le versant oppose de la montagne! Cette montagne est elevee, elle est couverte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y ont leur repaire. N'importe, Piek-i fait lever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Il prend un baton ferre pour se defendre des attaques des betes feroces, et, poursuivant sa route au milieu de tenebres, arrive enfin au lieu desire. L'arrive de Pieki et de ses compagnons repandit d'abord la frayer par mi les habitants de cette demeure isolee, et perdue au milieu des montagnes. On ne pouvait imaginer,,,,
정유(1777)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 절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백 여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곤란이 그렇게도 열렬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을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의 여행 목적지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갔을 때 밤이 되었다. 그는 더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내쳐 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께 어떤 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과 자기가 찾아가는 절은 그 산 뒤쪽 산허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실망은 어떠하였겠는가. 그 산은 높고 눈이 쌓이고 호랑이 굴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이)벽은 스님들을 깨워 자기와 동행케 하였다. 그는 맹수의 습격을 막아 내기 위하여 쇠꼬창이가 달린 몽둥이를 짚고서 캄캄한 밤중에 길을 계속하여 희망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이)벽과 그 일행의 도착은 산 속에 파묻힌 고적한 그 곳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이 아닌 밤중에 이처럼 많은 손님들이 찾아 들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구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두려움 뒤에 기쁨이 따랐으며, 그 기쁜 상봉으로 빚어진 심정을 얼마 동안 털어 놓느라고 미처 날이 새는 것도 몰랐다.(「한국천주교회사」상,300-301면)
결국 정약용 선생의 단순한 강학회 개최 기록에 대하여 다불뤼 주교는 그 내용을 아주 자세히 서술하였다. 다만 강학연돌를 1777년 丁酉년이라고 하였는데, 정약용 선생은 1779년 己亥년이라고 적고 있으며, 정학술은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1779년 강학 이후 7년(1785년)이 되던 해, 바로 이 강학을 비방하는 소리가 생기기 시작하여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할 수가 없었으니, 성대한 잔치는 두 번다시 하기 어렵다(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고 하였는데, 만일 이 강학이 당시 여기저기 흔하게 개최되던 儒敎의 강학이었다면 구태어 비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므로, 천주교 강학이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연도만 차이가 있을 뿐, 권철신, 정약전,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 등 같은 인물들이 강학하는데 이벽이 설중에 산을 넘어 밤중에 도착하였다는 내용은 같으므로, 1777년에도, 1779년에도, 같은 이물들이 겨울 한 밤중에 눈쌓인 큰 산을 넘어온 이벽선생과 강학을 하였다고 보기보다는, 당시 저명한 학자 권철신이 참석하는 같은 강학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동일한 인물들이 동일한 시기의 기후와 동일한 지리적인 여건과 상황에서 두 번의 다른 강학이었다면, 정유년 즉 1777년의 강학보다는 기해년 즉, 1779년의 강학이 더 발전된 천주교 강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약용이 말하는 기해년의 강학은 주어사에서가 아니고, 천진암에서 개최되었음을 다불뤼는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변기영 신부-
* 파리외방전교회 지부장으로 일하면서, 천진암 성지에 수없이 자주 왔던, Marcel Pellisse 신부도, 위의 문장들을 달레신부가 잘못 고쳤음을 인식하고, 다불뤼 신부가 소개하는 최초의 강학은 천진암에서 개최되었었음이 확실하다고 인정하였다.
참고: -II-
天眞菴 聖地와 李檗 聖祖에 관한 主要 根據文獻 拔萃 解說
-韓國天主敎會 創立史-卞基榮 著, 2007. 11. 18.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院 발행- 참조
I. 천진암 성지와 이벽 성조에 관한 근거문헌 개관 집약. II. 이벽 광암 공을 한국천주교회 創立者로 明示하는 문헌 . III. 천진암을 한국천주교 發祥地로 明示하는 문헌. IV.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에 관한 역대 로마 교황님들의 문헌.
(I) 天眞菴 聖地와 李檗 聖祖에 관한 근거문헌 개관 요약
1) Maubant 신부의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보고서 문헌] -1838년
- 이벽은 새 개종자(改宗者)들과 힘을 합쳐 조선 신도회(信徒會) 대표(代表)로 1783년 가을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2) Daveluy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록] -1850년
- 조선에 천주교회를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한 사람은 이벽이다. -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권철신을 선택하였다. - 이벽은 1777년 겨울, 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과 천진암에서 강학회. - 이승훈은 이벽의 말씀을, [大道師]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3) 丁若鍾의 증언 -[조선왕조실록] 1801년
- 정약종을 문초한 바, 이벽이 제일 먼저 천주교 책을 구해서 읽고 나서, 이승훈을 변장(變裝)시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 전교자(傳敎者)들을 만 나고 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4) 金大建 신학생의 [조선천주교회 약사] -1845년
- 조선 철학자(哲學者)들 중 가장 저명한 학자 李檗 博士가 이승훈을 북경에 보냈 다.
5) 李承薰 성현의 [서간 ] -1787년
- 제 평생에 대성현(大聖賢)을 한 분 만났는데, 이 분은 다년간 천주교 연구에 전념 하여 박학하고 실행하였고, 내게 천주교를 가르쳤고, 내게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6) [朝鮮王朝實錄]과 [闢衛編] 등의 기록 -1801년
- 조선 천주교의 시조(始祖) 즉 “一世”는 바로 李檗이라는 사실을 만인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도다.
7) 1785년 을사년 박해 내용 -[闢衛編] 1801년
- 1785년 乙巳년에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 집에서는 이미 여러 달째 권일신, 권상문,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이 모여 책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이벽을 모시고 앉아서, 자신들은 모두 이벽의 弟子라고 자칭하였는데, 이벽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것이 유교(儒敎)의 사제지간(師弟之間)보다 더 엄격하였다.
8)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esticae - 1885년
- 1770년 이벽 정약전 권철신 등은 깊은 산속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천주의 계명(praeceptis divinis)을 즉시 실행에 옮겼다.
9) Longford 교수의 [鷄林八道叢誌/Story of Korea]의 내용 -1911년
1720년에 이이명(李?命)이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들을 조선 선비들이 50년간 연구하였는데, 그 중에 李檗이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간 천주교를 연구하고는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1784년에 영세하고 오게 하였다.
10) [黃嗣永 帛書]의 표현 -1801년
이승훈에게 李檗이 가로사대(曰), “북경에는 천주당이란 집이 있고, 거기 가면 서양 선비들 중 전교자(傳敎者)가 있을터이니, 기도서(祈禱書=信經)를 구하러 왔다고 하고, 아울러 영세를 청하게, 이승훈은 그 말씀대로 하였다.
11) 丁若鏞 선생이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 詩文] 記錄 발췌 -1827년
石徑細如線(석경세여선)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난 이 오솔길은/ 昔我童時游(석아동시유) 내가 어려서 (10세이전)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 重來愴客心(중래창객심) 이제 천진암에 다시 온이 나그네의 마음은 서글퍼지네/ 紅葉題詩處(홍엽제시처) 여기서 우리는 [붉은 잎]을 제목으로 詩를 짓기도 하였었지/ 豪士昔講讀(호사석강독) 여기서 호걸들과 선비들이 일찍이 講學하고 讀書하였었지/ 尙書此燒鍊(상서차서련) 尙書(중용, 대학, 서전, 주역)는 우리가 여기서 소련했었지./ 荒寮草色深(황료초색심) 폐허가 된 기숙사는 잡풀만 수북히 자랐구나 / 禪燈廢少林(선등폐소림) 참선하며 講磨하던 학원(少林)은 아주 폐허가 되었구나./ 寅緣慙講德(인연참강덕) 새벽에 일어나서 덕목(德目)을 외우기는 차마 부끄럽지만/ 書帙見隨陰(서질견수음) 그래도 해가 지면 그런 책들만은 꺼내서 읽어 본다오/ 樓前寮舍半墟丘(루전료사반허구) 누각 앞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 터인데/ 禪房無處舊人求(선방무처구인구) 선방의 옛 親舊들은 어디 가도 구해올 수 없네./ 前?凄迷不可求(전촉처미불가구) 그 옛날처럼 다시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도다
12) 丁若鏞이 기록한 [權哲身 墓誌銘] 발췌 1822년
“일찍이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을 때, 주어사는 설중(雪中)인 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키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그 후 7(1785 년), 이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강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니, 이른 바 성대한 잔치는 다시 하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13) 丁學術의 [李檗傳] 발췌 1837년
천진암에 도우(道友)가 중도(衆徒)하니, 광암 공은 성교요지(聖敎要旨)를 하필(下筆)하였다 - 1837년 의 李檗傳
천진암 講學에 관한 내용이 『니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술(戊戌, 1778)년 이벽 광암 공이 25세 되던 해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정씨(丁氏), 이씨(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무관(武官) 홍군사(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산수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셨다. 광주(廣州) 땅 원앙산사(鴛鴦山 寺, 일명 앵자산 천진암)에 은거(隱居)하시매, 도(道)를 닦는 벗들(道友들=敎友들)이 총림(叢林, 衆徒, 僧團 즉 수도적 단체(修道的 團體, 衆徒=修道者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도를 닦는 벗들(道友)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도라 하였고, 지금의 교우라는 말도 도우(道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중도(衆徒)란 말은 중생(衆生)과 좀 달리 승려들을 말한다. 이 단체가 바로 성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이벽이 개종자(改宗者)들(proselytes)과 일심단합(一心團合, de concert)하여 또 다른 대표자(代表者, delegue)를 북경에 파견하던” 주체인 것이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기해(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광암 공을 웃어른으로 삼아(爲上) 모시자,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 선생은 기묘한 학문에 아주 박식하여 천문학(天文學)과 지리학(地理學), 의학(醫學)과 복술(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달통(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門下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총림(叢林=僧團)을 이루었으며, 그 명성이 세간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젊은 선비들의 단체가 결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하는 엄동설한 심야에 광주산맥(廣州山脈)을 넘던 이벽성조의 천진암 강학회 참석열성을 살펴본다.
14) 聖 다블뤼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記』1850년. 정약용이 몇자로 간단히 골격만 기록한 천진암 강학회를 그 내용에까지 보다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 기록은 바로 다블뤼 주교의『조선순교사 비망기(朝鮮殉敎史 備忘記)』인데, 그 번역원문과 원문 및 해설문을 직접 읽어보자.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권철신이 정약전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 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벽(檗)은 다른 스님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기이한 도착은 첩첩산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e)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edifice.:譯註 天眞菴을 말함)에였다...,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천주께 바쳐진 날 주일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음력으로 7일, 14일, 21일, 28일에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영혼(靈魂) 수련(修練)에 대해 생각하면서 소제(小齋) 즉 금육제(禁肉齋)를 지켰다.” 여기서 ‘l'edifice isole et perdu’란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흉가(凶家)나 폐가옥(廢家屋)을 의미하는데,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후 천진암을 찾아와 지은 시에서, “사파무구관(寺破無舊觀), 즉 천진암 절간은 그나마 다 무너져서 옛 모습이 없구나!”라고 하고 있다. 또, 당시에 저술된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남한지(南漢志)』에서도, “천진암은 앵자산(鶯子山)에 있는 오래된 헌 절인데, 지금은 제지공장(製紙工場)이 있어 사옹원(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천진암재앵자산 위고사 조지물 금속사옹원:天眞菴在鶯子山 爲古寺 造紙物 金屬司饔院)”라고 말하고 있다. 거의 동시대에 다산도, 다블뤼 주교도, 홍경모도 모두 천진암은 폐허가 된 옛 헌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강학 당시 천진암은 앵자산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뿐인 거의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 가는 시설물이었다.
정약용 선생이 [少林]이라고 부르는 천진암의 참선공동체를, 李檗傳에서는 정학술이 [총림(叢林)]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학술적 강학회를 이벽전에서는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천진암에서 이벽 광암공을 웃어른으로 모시고 지도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정약용이 기록한 기해년(1779년)의 강학회나, 다블뤼 주교가 기록한 정유년(1777년)의 강학회나 모두 한겨울에 폭설이 덮인 앵자산을 이벽성조께서 힘들게 넘으셨다는 것을 보면, 강학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시작했던 것이고, 또 폭설로 기간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다. 천진암에서 또 광암공이 道場을 정하고 있는 천진암에 광암이 으레 있으리라 믿고 모두 모였으나, 광암공이 뜻밖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보다는 이왕에 왔으니, 강학을 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녹암 권철신에게 공부할 겸 무슨 가르침을 들으러 정약전, 이승훈 등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권철신 상어동월 우거주어사:權哲身 嘗於冬月 寓居走魚寺 […] 집지청교어녹암지문:執贄請敎於鹿菴之門[…]) 광암공은 권철신이 잠시 우거(寓居)하던 주어사로 갔다가 허탕을 치고, 그 밤으로 즉시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와야 할 이유는, 천진암에 녹암공까지 와서 있다는 것이다. 당시 天學 공부와 天主敎 신앙의 열성으로 엄동설한에 廣州山脈을 넘나들던 젊은 선비 광암 공의 열의와 노력에, 또 선배 원로에 대한 예의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5) 정약용 선생이 단오날 천진암에 와서 지은 시 1797년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던 기록>
다산이 천진암을 방문하고 지은 시문 중에서 상당수가 교회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茶山은 천진암에서 광암공의 天學道場 활동 즉, 修道와 硏究와 講學會 개최 등에 참여하였음을 전제로 하는 추억의 詩文들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읽어보자.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기)”의 일부를 보자.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원공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풍류와 문채는 모름지기 신령한 경지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 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 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개관 요약 결론
같은 年度에, 같은 時期에, 같은 人物인, 李檗 曠菴 公을 중심으로, 같은 동료 人物들이, 같은 장소인 天眞菴에서, 같은 [모임]을 形成하여 眞理를 탐구하고 실천을 하였으니, 집안 어른들과 함께 사는 일반 양반 집 가정에서나, 儒敎 訓長의 감독아래서 배우는 일반 서당에서나, 또는 스님들이 불교를 봉행하는 정상적인 불교 사찰에서는 천주교라는 당시 생소한 종교를 자유롭게 실천할 수 없어서, 심산궁곡의 폐허가 되어가는 天眞菴에서 천주님의 섭리로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불뤼 주교는 기록하였다.
1770년 李檗 曠菴公이 天眞菴에 入山하여 讀書할 때 10세 전후의 어린 丁若鏞 형제들이 자주 놀러왔었으며(석아동시유(昔我童時遊)-丁若鏞),
1777년부터 1779년까지, 즉 曠菴公이 천진암에 入山 讀書한지 약 7년 후부터는 수준 높은 강학(講學)과 면학(勉學)으로, 성교요지(聖敎要旨), 십계명가(十誡命歌),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등을 저술하며, 음력주일(陰曆主日) 제정, 실천, 등의 신앙공동체(信仰共同體)가 있었으니,
1827년 늦은 봄에, 정약용 선생이 천진암 현장에 와서 지은 詩에서,
“천진암은 호걸들과 선비들이 강학하며 독서하던 곳으로 명기하고 있고, 더구나 옛날처럼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德目(三德誦, 十誡命, 등)을 외우기는 차마 부끄럽지만, 해가 지면 그래도 그런 책들만은 꺼내서 읽어본다오.”하였으니, 이는 1779년 기해년 강학 때 조석으로 외우던 사물잠(四勿箴)이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든가, 아니면 천주교의 三德誦 등일 것이니, 이미 7요일을 배우고, 주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누각 앞 또랑 건너 우리가 공부하던 기숙사들은 무너져 절반이 빈 터인데/ 그 때 이 道場 선방(禪房)에서 勉學 修道하던 옛 친구(親舊)들은 다 죽었으니/ 이 세상 어디를 간들 다시는 찾아서 구해올 수가 없네그려/ 아! 여기서 다시 勉學 講學하며 그 옛날처럼 살아볼 수 없으니, 애닲으도다!”
天學 연구를 위하여 천진암에 모여 학문적 차원에서 출발한 후, 신앙적 차원으로 昇華시킨, 10여 년간에 걸친, 젊은 선비들의 이 團體와 會合에 대하여,
丁學術은 이를 李檗傳에서, [총림(叢林)], 즉 “승단(僧團)”이라 하였고,
丁若鏞의 묘지명(墓誌銘)에서는, [講學會]로, [소림(少林)]이라하였고,
Maubant 신부는,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elytes], 즉 “몇몇 改宗者들의 團合體”로 표현했고,
Davely 주교는, [Grande Conference de Ni-Pieki], 즉 [이벽의 위대한 講學會]라고 하였으며,
金大建 神父는, [multi philosophantes......,inter eos Doctor Ni-Pieki......,], 즉 “哲學者들의 모임]으로 표현하였으며,
Joseph Longford 교수는, [a small coterie of noble Koreans], 즉 “양반선비들의 작은 同人會 모임]으로 음력주일까지 제정, 실행하는 小그룹이라고 하였으며,
1800년대의 국내외 관계인사들과 識者들의 문헌에서 천진암 성지에서의 한국천주교회 發祥史에 관한 동일한 내용을 다양하게 기록한 저 明明白白한 역사적 史實을 부정할 수는 없다. 天眞菴 聖地에서의 한국천주교회 출발은 國內外 학자, 성직자들이 異口同聲으로 확인하며 감탄하는 사실이다. 일체 疑惑이나 否定이 不可能한, 너무나 분명하게 確證된 한국 천주교 發祥地이다.
(II) 광암 이벽 성조를 한국천주교회 創立者로 明示하는 근거문헌
1) 李檗은 그의 위대한 講學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하였다. -다블뤼 (St. Davely) 주교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始動을 걸어, 천주교회 출발을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덕조라고 부르고, 호는 광암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a la religion dans ce royaum de Coree fut Ni Pieki appelle Tektso et surnomme par luime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 Kieng Tsiou.” “眞正한 意味의 조선천주교회의 歷史는 李檗의 講學에서, 李檗의 저 위대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e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erences de Ni Pieki”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創立하기 위하여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여 주초로 삼았다. “Kouen Ambroise, T'siel sini etait l'aine de la famille des Kouen que Ni Pieki choisit pour en faire le fondement de la religion dans ce pays”
2) 李檗은 새로 改宗한(proselytes) 이들과 힘을 합쳐서, 조선신도 공동체의 代表者(delegue)로 1783년에 李承薰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모방(St. Maubant) 신부
“1720년경에 북경에 다녀간 사신 李公(李?命)이 서양선교사들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는데, 이 책들을 구해 읽은 광이라는 사람(曠菴 )은 후에 요한이라는 敎名을 가진 분이고, 이 사람이 천주교 교리에 同感하고 心醉하여, 천주교를 全心으로 받아들였고(embrassa la religion chretien)[…]광이라는(曠菴) 이 사람은 이 새 종교에 합류한 몇몇 改宗者들(proselytes)과 함께 힘을 합하여(de concert) 1783년에 자기들의 또 다른 代表者(autre delegue)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였는데, 이 대표자는 1784년 2월에 베드로라는 敎名으로 세례를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3) “李檗은 朝鮮天主敎의 始祖다.” -李晩菜의 闢衛編
<이만채(李晩菜), 벽위편(闢衛編) 신유치사(辛酉治邪, 1801년),悅話堂, 1971, 289면>
“요사스러운 전 水使 李晳의 兄 李檗은 저 邪惡한 천주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두머리로서 천주교인들의 始祖(一世)라는 것을 萬人이 다 알고 있는 바(共知)로다.” (“水使李晳卽一物怪人妖也,[…]其兄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耶共知也”)
4) 맨 처음 李檗이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전파할 때, 權哲身의 동생 權日身은 熱心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 - 丁若鏞의 鹿菴 權哲身 墓誌銘 -
“처음에 李檗이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전파하고 다닐 때, 추종자들이 벌써 무리(衆)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때 녹암 權哲身의 동생 權日身은 熱心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始李檗首宣西敎從者旣衆,,,公之弟日身熱心從檗”)
5) “大聖賢 李檗이 저에게 天主敎를 가르쳐주셨습니다.” - 李承薰
이벽성조에 의해 파견되어 1784년 봄에 북경에서 領洗하고 온 이승훈 선생은, 1789년에 북경 선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간을 보냈다.
“제 일생에 聖賢을 한분 만났사온데, 이 어른은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이미 가지고 계셨고, 그 책 내용에 대하여 아주 여러 해 동안 전념하며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켰습니다. 이 어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우리 종교의 여러 가지 점들, 특히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까지도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종교에 대한 이 어른의 信德과 열성은 교리지식보다 훨씬 더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바로 이 어른이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시고, 저에게 魂을 넣어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함께 천주를 섬기는데 있어 상부상조하였습니다.” 이 서한은 1789년에 李承薰 先生이 북경의 宣敎師들, 즉 그라몽 신부나, 알렉산델 구베아 주교 등,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漢文原本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다만 佛語 譯本만이 전해진다: 聖賢(un savant)은 李檗聖祖를 指稱하고 있다.
“Dans ma course j'ai rencontre un savant qui avoit trouve un livre de notre Religion, auquell il s' etoit applique pendant plusieurs annees. Son travail n'avoit pas ete inutile, il avoit des connoissances sur les points de la Religion les plus difficiles a comprendre; mais sa foy et sa ferveur surpassoit encore ses connoissances. C'est lui qui m'instruit et m'anime, nous nous sommes aides mutuellement a servir Dieu[…]”(L'E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EE. Par Andreas Choi, 1961 Nouvelle Revue de Science Missionaire Suisse. Schoneck-Beckenried. Switzerland. P.91, APPENDICES).
6) 1783년 李檗 성조께서 이승훈 進士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면서 훈계하는 말씀을, 이승훈 진사는, “大道師(Maitre)"의 命으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였다.
- 다블뤼 주교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標識일세. 북경에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우리민족의 生死가 걸린 일일세.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이승훈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itre)처럼 받아들였으며,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相互共同의 신념인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ibid. 10면: “Seng houni ecouta d'un air soumis ces paroles de Pieki qui le penetraient profondement et les recevant comme la parole du Maitre, il promit de faire tous ses efforts pour realiser leurs communs desirs.”
7) “李承薰, 丁若鏞 3兄弟, 權日身 父子, 等이 모두 李檗을 스승으로 모시고 앉 아서”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 闢衛編
1784년 이승훈 선생이 북경에서 영세귀국한 지 1년 후에 일어난 1785년 乙巳迫害에 관한 闢衛編의 기록에도 광암 이벽성조와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관계를 쉽게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乙巳년(1785년) 봄에 장례원(掌禮院) 앞에 있는 金範禹의 집에 李檗이라는 사람이 설교를 했었는데, 푸른 수건으로 머리와 어깨를 가리고 벽을 기대어 좌정하고 앉아 있었으며, 그 앞에는 李承薰, 丁若銓, 丁若鍾, 丁若鏞 3형제와 權日身 父子가 책을 손에 들고 李檗을 모시고 무릎을 꿇고 둘러앉아서 이벽의 설법을 듣고 있었으며, 모두가 스스로 다 자기들은 이벽의 제자들이라고 부르더라. 李檗이 저들을 가르치고 꾸짖고 하는 기품이 얼마나 엄격한지, 우리 儒敎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는 禮儀보다도 훨씬 더 엄하게 하고 있었다.” 李晩菜 闢衛編 乙巳秋曺摘發, 1785년, 1면: "乙巳春李承薰與丁若銓若鏞等說法於掌禮院前中人金範禹家有李檗者以靑巾覆頭垂肩主壁而坐承薰及若銓若鍾若鏞三兄弟及權日身父子皆稱弟子挾冊侍坐檗說法敎誨比之吾儒師弟之禮尤嚴"
8) “天學 硏究에 탁월한 李檗博士가 李承薰을 北京에” -金大建 神學生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되기 전 神學生 시절, 1845년에 썼던 朝鮮天主敎會 略史 報告書 첫 머리에서도 광암 이벽성조의 업적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한다. “조선에는 많은 哲人들(philosophantes)이 자발적으로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참 天主가 계시다는 것(naturali lumine[…]verum Deum […])을 자발적으로 연구하여 인식하고 섬기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나게 가장 유명한(inter eos celebrior) 사람은 李檗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깊히 연구하여 참되신 천주를 공경하고자 노력한 나머지, 당시 북경에는 천주공경이 번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북경에 보내어 천주교서적을 가져오게 하려고 작정하고, 마침내 이승훈은 李檗 博士(doctor I Pieki)에게 가서 자신이 아버지 李東郁을 따라 北京에 간다고 하였으며,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거든 서양 사람들을 찾아가 천주교 서적을 얻어오라고 하였습니다.”金大建神父의, “新生 韓國天主敎會 略史 槪觀-Generalis notitia super nascentem Ecclesiam Coreanam”, 1845 :
“Inter eos celebrior fuit vir nomine I Pieki(nomen baptismi Joannes Baptista). Hic magno studio veri Dei cultum inquirens, cum audivisset religiopnem Domini caeli nuncpatam in Pekino florere,statuit homines mittere, qui illius religionis libros afferrent. Transacto demum aliquod temporis spatio, quumque legati proficiscerentur versus Pekinum; filius tertii legati I Senghugni dictus, adiit doctorem I Pieki eique se in Sinas profecturum affirmavit.”
9) 원래 천주교 책을 제일 먼저 구해서 읽고 믿은 李檗이 이승훈을 변장(變裝) 시켜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선비들을 만나고 책들을 가지고 오 게 하였습니다. -丁若鍾의 문초록, - 朝鮮王朝實錄, 辛酉年 記錄
“丁若鍾을 문초한 결과, “원래 처음으로 西洋學(天主敎)을 듣고 알게 된 것은 李檗이었고, 李檗은 이승훈을 몰래 變裝시켜 꾸며서 아버지 이동욱 公을 따라 북경에 가도록 보내었습니다.” 朝鮮王朝實錄 47권 410면 : “若鍾供原初李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隨其父東郁貢使之行入往洋人所居之堂與洋人結識購得洋書以歸與李檗及伊之兄弟若銓若鏞李家煥等同與講讀師法遂乃棄父母結徒黨[…]”
10) “朝鮮 天主學의 始祖 李檗이 魁首다.” -朝鮮王朝實錄 47권 374면 辛酉년 항목
“李檗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李格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은 즉시 벌을 주어 내 쫓아야 한다“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로 말한다면 그것은 李檗이다.”朝鮮王朝實錄47권(1801년), 374면:“正言李毅采疏略曰憶彼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狼籍無餘以其罪塊誅之先加雖관家煥輩之同律而李格以邪魁之同氣尙在宿위之列[…]邪魁李檗之兄李格宜先施放逐之典[…]”朝鮮王朝實錄47권(1801년), 375면 :“執義柳?疏略曰若論邪黨之巨魁厠李檗是已檗之兄格尙厠朝籍[…]”
11) “北京 天主堂에 가서 祈禱書를 求하고 領洗를 請하게.” -黃嗣永 帛書
또한 李檗이 李承薰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오게 하였음을, 앞에서 인용하였던 다블뤼주교의 서한, 丁若鍾의 증언,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편지 등에서 이미 보았는데, 黃嗣英(1775~1801) 進士는 이를 자신의 帛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고 깨끗이 살던 道人 선비 李檗이 기특히 여기며 크게 믿음직하게 여겨 기대하던(大奇之) 선비였다. 계묘년(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갈 때, 李檗이 이승훈에게 가로사대(曰), 북경에 가면 天主堂이 있고, 천주당에는 傳敎者인 서양선비가 있을 터이니, 가서 信經 祈禱書를 求하고, 아울러 領洗하기를 청하도록 하게(幷請領洗). 그러면 서양선비 傳敎者가 자네를 무척 사랑할 걸세. 그리고 여러 聖物을 많이 얻어가지고 와야지, 결코 빈손으로는 돌아오지 않도록 하게. 이승훈은 李檗의 이 말씀대로(承薰 如其言) 북경 천주당에 도착하여 洗禮받기를 청하였다[…].”黃嗣永 帛書, 1801년 : “李承薰 伯多祿 布衣李檗大奇之[…]癸卯隨父入燕 李檗 密托 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 子往見之 求信經一部 幷請領洗 則西士必大愛之[…]李承薰如其言 到堂請洗.”
결론: 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講學과, 이승훈 북경 파견과, 이가환, 이기양과의 공개적인 교리토론회 승리, 권철신 형제들의 입교, 등 활동을 통하여 그 위업을 수행한 광암 이벽 성조는 다불뤼 주교, 모방 신부, 정약용 선생, 김대건 신부, 이승훈 성현, 벽위편,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異口同聲으로 밝히고 있듯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광암 이벽 성조의 天學 道場이며 敎理硏究와 信仰實踐의 本據地, 즉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관계된 문헌 기록을 살펴본다.
III. 천진암을 한국천주교 發祥地로 明示하는 근거 문헌
1) 천진암은 이벽 성조의 天學道場인 讀書處가 있던 곳이다. -丁若鏞, 丁巳年의 詩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記 (단오날 두 형들과 천진암에 와서 노닐며 보니,) 天眞菴엔 아직도 李檗의 讀書處가 그저 그대로 있는데.”- 丁若鏞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이벽의 讀書處는 아직도 저기 그저 그대로 있는데 苑公棲跡杳難尋(원공서적묘난심) 苑公이 깃들던 발자취는 아득히 다시 찾기 어렵도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風流와 文采는 모름지기 神靈한 境地에서라야 하리니, 半日行?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그시절 그리며 한나절내 술마시고 한나절내 시를 읊노라. 이 詩는 丁若鏞 선생이 1797년 丁巳年에 쓴 것으로서, 이벽성조께서 1785年 殉敎하신지 12년 후이고, 天眞菴에서 講學會가 개최되었다고 거론되는 첫 번째 해(1777년)부터는 20년 후다. 이 詩는 광암공이 天眞菴에서 讀書할 때 茶山이 이미 수차례 왔었거나 아니면 함께 거하며 讀書를 함께 하였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讀書라는 말인데, 조선시대에는 고위관리의 특수 전문연구기관이었던 讀書堂이 있었으니, 讀書라는 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대학원에서의 연구를 포함한 수덕적 차원을 의미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벽성조의 讀書處가 천진암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의 道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苑公이란 말은 원풍지인(苑風之人)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뒤흔들고 가버린 큰 회오리 바람 같은 巨人을 뜻하는 것으로 이벽성조를 가리키고 있다. 혹자는 “원공(苑公)”을 어떤 스님을 지칭한다고 말하지만, 당시 언어문화 관습상, 스님들에게, “公”이라는 사용하지 않는다. 大師나 和尙이라는 표현은 쓸 수 있으나, 스님들에 대해서 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독서처는 왕실에서 설립한 讀書堂, 즉 오늘날의 국립 연구원과 차별되는 在野의 젊은 선비들이 주로 혼자서 3년독서, 7년독서, 때로는 10년독서하던 修學道場이었다. 독서처로는 심산궁곡이나 암자주변이나 혹은 隱遁處와 유사한 곳을 정하며, 입산하여 독서를 시작하는 나이는 대부분 15세 전후인데, 이는 3국시대 때부터의 오래된 관습이다. 예를 들어 화랑도의 경우도 15세에 入山하여 18세에 下山하는 것이 관례였다.
광암 이벽 성조의 천진암 독서처 시작에 관해서는, Pullo-Pinang 역사교과서,즉 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와 Longford 교수의 역사서에서, 심산궁곡에서 이벽의 천학연구 시작을 둘 다 177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데다가, 정약용의 묘지명에서도 자신도 이벽을 추종하였고, 형 약전은 일찍부터 이벽을 따라 추종하여 다녔으며(嘗從李檗), 특히 훗날 천진암에 와서 다산공이 지은 시에서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길은 자신이 어려서(童時) 노닐던 길이라 하였고, 정약용이 결혼하던 15세(1777년 정유년) 때는 이미 이벽한테 배워서 알고 있는 7요일을 거론하며 이벽을 이해하며 지지(?)하는 시를 지었음을 보면, 광암 공은 1770년 15세경부터 자기의 시골집있던 팔당 두미와 두미 여울 건너 마재의 자기 누님(정약현의 부인)댁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천진암에 입산 독서하였고, 정약전 3형제들은 종종 10세미만부터 천진암에서 독서하는 광암 공한테 형수 심부름 겸(?) 자주 놀러 다녔음을 알게 한다. 한문에서 童時는 10세미만을 말하고, 10세이상은 대개가 少年이라고 표현하며, 早失父母에서 보듯, 早역시 10세 전후를 가르킨다. (令德勉早修). 등.
2) 천진암에 도우(道友)가 중도(衆徒)하여, 李檗聖祖를 웃어른으로 삼으니(爲上), 그 문하생(門下生)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하필(下筆)하시였다. -丁學術의 李檗傳
“戊戌(1778)년 이벽성조께서는 25세 되던 해에 星湖 李瀷先生을 따르는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어진 선비들, 丁氏 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쓰셨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武官 洪軍士한테서 천주교 책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열중하여 읽으신 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시고는 山水가 좋은 곳을 노닐으시며 다니시다가, 일단 廣州에 이르러 鴛鴦山 寺(一名 앵자산 천진암)에 隱居하시매, 道를 닦는 벗들(道友들=敎友들)이 叢林(=衆徒=僧團), 곧 修道的 團體(衆徒=修道者들)를 이루게 되자, 이들에게 聖敎要旨를 지어 부르시어(마치 敎科書처럼), 받아쓰게 하시었다.” 여기서 道를 닦는 벗들(道友)이란 이벽성조께서 강의하는 천주교 도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 곧 천주교로 입교한 이들이다. 지금의 종교라는 말을 당시에는 道라 하였고, 지금의 敎友라는 말도 道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衆徒란 말은 衆生과 좀 달리 승려 지망자들을 말하는데, 당시에는 修士 혹은 修道者들, 共同體, 등의 현대적인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을 때였다.
결국 당시에 천진암에서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나 東學 초기의 水雲 崔濟愚의 門徒들처럼 修道的이며 勉學的인 젊은 少年 信徒 弟子들이 단체로까지 形成되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단체가 바로 聖 모방 신부의 문헌에 나오는, “李檗이 改宗者들(proselytes)과 一心團合(de concert)하여 또 다른 代表者(delegue)를 북경에 파견하던” 主體일 수밖에 없다. 『니벽전』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적고 있다.
“己亥(1779)년 이벽 선생이 26세 되시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學文에 힘쓰는 제자들이 웃어른으로 삼고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山寺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 선생은 기묘한 學文에 아주 博識하여 天文學과 地理學 醫學과 卜術,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답변하는데 있어서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如流水),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그 門下에는 叢林(=僧團)을 이루었으며, 그 名聲이 世間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丁學術의 李檗傳
3) 한국에서 최초로 요일(曜日)을 가르치며, 主日을 지키던 天眞菴의 李檗 聖祖와 그 叢林들에 관한 기록. -丁若鏞, 다블뤼 주교, 등의 기록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갖춘 李檗은 7요일이 차례로 번갈아 바뀐다고 하는데, 草木도 해마다 다시 번복되듯하며 생장하고 있지 않은가” - 丁若鏞
七曜迭舒卷 (칠요불서권) 일곱 요일은 날짜와는 달리 번갈아 바뀌는 것이니, 貴達安所羨 (귀달안소선) 부귀와 영달 같은 것을 뭐 그리 부러워 하시리오. 賢豪氣相投 (현호기상투) 曠菴公은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다 갖추시었고, 令德勉早修 (령덕면조수) 어려서부터 일찍이 학문과 덕행을 힘써 닦으시니......, - 정약용의 “贈李檗” 獻詩에서.
정약용 선생은 1777년 15세로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李檗 曠菴 先生을 가리켜,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함께 골고루 갖추셨으며(賢豪氣相投),” 또 “어려서 일찍부터 德을 힘써 닦으신 어른(令德勉早修)으로” 完德의 標本이라고 여기면서, 李檗聖祖를 존경하였다. 이때 지었던 “贈 李檗”이라는 詩의 일부를 발췌하여 읽어보자. 특히, 우리나라에서 요일(曜日)을 최초로 알리고, 천주님의 날, 主日을 처음으로 지키며 가르친 분은 광암 이벽성조였다. 더욱이 10여세 전 후(早)부터 修德에 힘썼음은 일반 가정에서가 아니고, 심산궁곡의 道場에 투신하였었음을 뜻한다. 또한 가을 단풍이야 다산의 고향 마재의 뒷동산과 앞의 검단산, 및 가까운 용문산 단풍도 훌륭한데, 구태여 단풍구경을 하려고 天眞菴을 찾고 시를 읊어보는 다산의 허전한 심정은, 잊지 못하는 曠菴公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랴? 조정에서 현직으로 분망한 중에도 정약용은 이하에서 보겠지만 마치 母校를 찾듯 天眞菴을 자주 찾는다. 또 종종 天眞菴의 “菴”字없이,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天眞菴 賞楓
買酒花郞坊裏(매주화랑방리) 화랑방 동네에 들어가 술을 사가지고, 停車?子峰陰(정차앵자봉음) 앵자봉 그늘에서 수레를 멈추니, 一夜纖纖白雨(일야섬섬백우) 하룻밤 부슬부슬 내린 실 이슬비에 雨厓??紅林(우안섭섭홍림) 양쪽 산 더욱 붉고 싱싱하게 물들었네.
또 정약용 자신이 얼마나 광암공을 따랐었는 지는, 다산이 지은 녹암 權哲身 公의 묘지명 중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자신은 李檗을 추종하였고(從 李檗), 자기 형 丁若銓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李檗을 추종하였으며(嘗從李檗), 李檗이 제일 먼저 수령(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宣傳하고 다닐 때 權日身은 熱誠的으로 李檗을 추종하였다(李檗 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鹿菴 權哲身의 墓地銘을 쓰면서 다산이 밝힌 이와 같은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로, 順庵 安鼎福의 글을 살펴보자. 順庵 安鼎福은 權哲身과 權日身 두분 성현들에게 꽤 여러 편의 서간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曠菴 李檗聖祖께서, 首領이 되어 天主敎를 처음 宣布하고 다녔음을 傍證하는 내용이 있다. 順庵 安鼎福이 1784년에 權旣明(=權哲身)에게 보낸 書簡 중에,
“諸君들이 평소에는 佛敎를 배척하였었는데, 이제는 天主學에 빠져서 속수무책으로 꼼짝달삭을 못하는 것을 보면 그 天主學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그렇게 감동을 시킬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편지에서 그 천주학 책들을 내게 좀 가져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일세. 그런데 최근에 李德操가 多少間의 몇몇 天主學 책들을 품에 안고 다니면서, 자네들한테도 전도하러 찾아 갔었던 모양인데, 그 사람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왜 나한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 연고를 모르겠네그려[…].”
여기서 權哲身은 權旣明으로, 權日身은 權省悟로, 李檗은 李德操로 부르고 있으며, 德操는 본래 德祖를 茶山과 順庵이 당시 그렇게 불렀었으니, 비록 聖賢의 學德과 豪傑의 氣魄을 지니셨으나(賢豪氣相投), 고집이 세고(다블뤼의 朝鮮殉敎史 備忘記), 또 志操가 굳세어(豪傑의 氣魄), 德祖를 自他가 德操로 불렀다. 즉 德操는, 修德을 貞操를 지키듯 志操를 가지고 마음을 잡고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770년 17세를 전후하여 讀書에 열중하던 광암공은 당시 관습으로 15세 전후에 결혼을 하는데, 학문 연구와 修德에 열중하기 위하여 가정의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천진암 산 속에서 天學硏究에 전념하며 천주교 계명을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래서 외아들 李顯模가 태어나는 것이 1784년이니, 꼬마신랑시대의 早婚 풍습이 있던 당시로서는 양반 집에서, 더구나 병조판서 대감 權??의 딸과 결혼하였다면, 병판감의 딸이 결혼 후 친전에서 30이 넘도록 출가를 시키지 않았을 리도 없었거니와, 茶山公이, 이벽성조께서는 “일찍 어려서부터 남달리 德을 닦으셨도다(令德勉早修)”하신 것을 보면, “일찍 어려서(早)부터”의 “早”라는 漢字의 용법이 당시 10세 전후를 가르키는 것이므로(예, 早失父母),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가족들과 살면서가 아니라, 남달리 특수하게 덕을 닦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詩는 丁若鏞선생이 15세 때 결혼하던 해에 당시 23세의 광암공에게 지어드린 獻詩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李檗聖祖의 부인 柳閑堂 권씨가 일찍 사망하는 것도, 사위 이벽이 天主學에 미쳐서 20여세의 젊은 자기 딸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마치 생과부처럼 한맺힌 고통을 주어 생사람 죽였다하여, 장인 權??은, 1785년 乙巳迫害 때부터 천주교 박해에 적극 앞장섰던 것이다. 죽은 딸의 한을 생각하며, 사위 李檗을 망치고 따을 생과부로 죽게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이 가중된 것이었다.
4) 天眞菴의 李檗 讀書處와 講學堂은 젊은 선비들의 天學道場이었다
1770년 경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16세 때 천진암에 讀書處를 정하고 天學을 연구하며 실천하자, 예를 들어 그의 사돈들인 12세의 정약전, 10세의 정약종, 8세의 정약용 등은 어린 나이에도 자주 천진암의 李檗 讀書處 道場에 와서, 勉學 修道하던 “이벽성조를 존경하고 추종하면서, 月曆과 數學, 幾何原本, 등, 아주 심오한 것까지 듣고 배웠다”고 정약용선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정약전은 12살, 정약종은 10살, 정약용은 8세였다. 이들은 10여년간 천진암의 李檗讀書處에 자주 다니며, 天學道場의 기능을 겸하던 거기서 한 때 함께 修學하였음을 알리는 詩들을 지었다.
즉, 훗날(1827년) 65세의 老人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 어린 시절 天眞菴에서 함께 修學하던 벗들, 곧 玄谿 令公과 石泉 翁과 季林과 聖九와 規伯 및 3 가정의 아들들과 함께 폐허가 된 천진암을 찾아왔다. 스님들은 모두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없었기에, 이들은 아랫 마을 伊蒲의 안내로 3일을 머물렀다. 이때 丁若鏞은 40餘首의 詩를 지어 天眞消搖集을 남겼는데, 그 중에 몇 줄을 뽑아 읽어보자.<다음 항목에서 계속>
石徑細如線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실처럼 가늘게 난 이 오솔길은, 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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