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천주교회가 어떻게 세우고, 지켜온 나라인가? 일반 국민들 대부분은, 심지어, 한국천주교회 신자들도 잘 모르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우고, 또, 실제로 어떻게 지켜 왔나? <Foundation history of Repuiblic of Korea supported by the Catholic Church !>
大韓民國 國號 來歷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기고나서, 10년 후,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발발하였고, 그 이듬 해, 중국 상해에 집결한 대한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은, ‘황제의 나라’, ‘大韓帝國’을, ‘백성의 나라’, ‘大韓民國’이라고 고쳐 부르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또한 大韓은 三韓은 물론, 지금의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의 옛 고구려와 발해의 강토를 포함하는 大韓民族의 국가들을 의미하고 내포하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美.蘇. 양대국의 점령하에 남북이 분단되자,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특히, 남한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려는 정권과 북한의 소련식 自由不在 공산주의식 정치 조직의 충돌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3년 후에서야, UN 대표 참관단을, 소련 영향하의 북한이 거부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마침내, 한민족 역사상 최초의 자유 총선거가,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남한만이라도 우선 실시하여, 제헌국회를 결성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선포하고, 우리나라의 국호를,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받아, ‘大韓民國“이라고 제정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하게 되기까지, 건국 전후에 천주교회가 하였던 역활을 알고 있는 국민들은, 심지어 현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으므로, 몇가지만이라도 우선 간추려 본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온 겨레가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천주교회가 한 일은 무엇인가? 너무나 많은 識者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또 알아야 한다.
사실 8월 15일은 가슴벅찬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이다. 온 국민이 자자손손이 경축해야만 하는 뜻깊은 날이며, 건국 선조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 이 기회에 대한민국 건국 전후에 천주교회가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탠 역사를 더듬어 보자.
-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건국활동사 개요-
대한민국 건국사에 美國 Francise Spellman 추기경과 中國 우삔(于斌)대주교, 한국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잊혀진 대한민국 건국 활동 略史.-
해외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외국인 주교들의 잊혀진 活動 略史와 2천년 천주교회사를 훑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天上의 聖人聖女들 축일이나, 특히, 사도시대부터 거의 1900여년 동안 천주교회 신도들이 기념하며 경축하는 천상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기념축일에 종종 무서운 전란이나 극심한 흉년이나 인류의 불가항력적 전염병 같은 재난이 종식되는 특은을 베풀어주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12월. 8일(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세계 2차대전은 마른 봄의 산불처럼, 특히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연전연승으로 확전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이 승리하는듯 하였다. 성모 마리아 축일에 전쟁을 일으키면, 성모 마리아 축일에 반드시 망한다는 중세 유롭의 속담이 있는데, 사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 무조건 항복하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런데, 1935년 로마에서 대주교로 서품되어 뉴욕 대교구장이 된, 미국의 천재적인 영웅 성직자 Spellman 대주교는, 남미의 빈민국 푸에르토리코, 등 남미에서 수십년간 계속 몰려오는 60 여만명 밀입국 이민들을 보살피면서, Spellman 대주교 자신이 당시 약소민족의 설움을 체감하였으니, 우리 한민족역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품팔러 가기 시작한 후로, 특히,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의 압제를 피하여,대한독립운동차,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및 윤을수 신부, 등의 미국 내 조선인 입국자가 늘어가면서,미약한 대한독립 운동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Spellman 대주교는, 당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에 4선까지 당선한 Franklin.Roosevelt 대통령과 절친한 오랜 친구 사이로서, 2차 대전 중에는 미국 뿐 아니라, UN 군의 육.해.공.군의 합동 군종사령관으로 Spellman 대주교를 임명하여, 3,300여명의 종군신부들과 2500여명의 군종 목사들의 총 지휘관으로 전투 현장을 누비며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공격 전투기를 맞아 침몰 중인 미국의 군함에까지 달려 가서, 병사들을 구출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동시에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도 임명되어, 중국(장계석), 영국(처칠), 소련(스탈린), 등 유롭과 아시아의 정상들을 수시로 방문하며, 전쟁 확대 예방과 축소, 종결을 위하여, 세계 평화 조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므로서, 당시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내에서 軍.官.民과 정치계에서 최고의 존경과 신망을 받는 고위 성직자였다. 특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종종 건강에 불편을 느끼던 Roosevelt 대통령의 해외 국제회담 업무에도 함께 동행하며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불가피하였다.
특히,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종종 건강에 이상을 느끼던 Roosevelt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해외 국제회담 업무에 함께 동행하며,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사실 영국의 쳐칠 수상과 함께,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Roosevelt 대통령은 그의 자문역이며, 해외 전권특사이기도 했던, 연합군 군종 총 사령관으로 정신전력의 化身이었던 Spellman 대주교의 제안과 추진력에 힘입어, 당시 국제회의 말썽꾸러기요, 이기주의 유물론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어렵게 설득시키면서,국제연합(United Nation)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였다.
또한Spellman 대주교는 틈틈히 강의와 강론집 저술과 문학적인 詩文集 저작 발행에도 큰 자취를 남길 정도로, 천주교회의 목자요, 문학가이며,사상가이며, 국제 정상 외교관으로서, 특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투 현장을 누비는 신출귀몰하는 군종 사령관이었다.
<미국 역사상 Roosevelt 라는 이름을 가진 대통령은 2명인데, 제26대 (1901~1909), 대통령Theodore Roosevelt (1858 生~1919 死)와,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1932~, 1936~, 1940~, 1944~), Franklin Delano Roosevelt(1882生~1945死)와 구별해야 한다. Theodore Roosevelt 는 1910년 한일합방과 이어서, 1917년에서야 종전한 세계 1차대전 전후의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고, Franklin Delano Roosevelt는 1945년에서야 종전된 세계 2차대전 전후와 전쟁 중에, 세계정세 영향을 끼쳤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국제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어준 미국의 2명 대통령은 근대 인류 전쟁사에 위대한 인물들이며, 더우기,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U.N. 창설을 주도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의 자문역이었던 뉴욕 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의 천재적인 선견지명과 안목은 U.N.창설의 설계자요 추진의 원동력이었다.>
1943. 11월. 27일, Spellman 대주교는 에집트 Cairo 회담 전후에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최측근 동행하며 옆에서 보좌하며, 대통령 전권 특사로서 약소민족들의 自治權, 특히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당시 세계의 유력한 관련 4대 강국 정치 지도자들을 일일히 일부러 찾아가 만나서, 정복주의를 단념케 하고, 약소민족들의 자결주의를 설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정치 고문으로 장총통과 절친한 南京 대교구장 우빈(于斌) 대주교도 일부러 찾아가 만나서, 조선의 독립과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 當爲性을 알리며, 약소민족들의 독립국가 수립,지원을 강조하였다. Spellman 대주교는 히틀러의 독일과 일본의 약소민족 점령주의를 막아야 한다는데 굳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1945년 7월 26일, Spellman 대주교는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가서, 회담에 참석한 장개석 총통과 처칠 수상,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에게 약소민족들의 民族自決主義, 특히 大韓獨立 지원을 배후에서 틈틈이 역설하며,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의 역할도 하였다 .
당시 미국에 머물며 한국독립 운동에 투신하던 이승만 박사가 훗날 귀국하자마자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마련된 명동대성당에서의 귀국 환영식 중에, 또 중국에 머물다가 좀 늦게 귀국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金九 主席도, 귀국하자마자 명동대성당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요인들 귀국 환영미사 중 답사에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은 각각 공식적으로 남경 우삔 대주교와 뉴욕 스펠만 대주교로부터 받은 성원를 공식석상에서 정중히 언급하며 천주교회의 주교들과 신도들에게 깊히 감사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성모 승천대축일에 마침내 일본 소화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므로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미국의 원자폭탄 2개 투하로 항복하였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일본은 무서운 군사제국이었으므로, 일본 군 장병들에게, 후퇴나 항복, 같은 개념이 없던 아주 독종 군사대국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되기까지는, 로마 교황이 앞장서서 보이는 모범과 호소에 응답하는, 전 세계 천주교 신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일본, 독일의 점령주의 전쟁에 대한 강력한 비난 여론 조성과 각종 민간 대회와 행사와 궐기대회가 연일 폭격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전 세계 모든 천주교신도들이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지상의 신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특히 국내에서 뿐 아니라, 해외 하와이나 로스안젤리스, 남미, 등지에서까지, 나라없는 우리 한민족이 바치던 愛國歌 祈禱 소리,"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가 그치지 않음으로, 하늘의 손길이 일본의 소화천황 마음을 움직여도록, 또, Paris, London, Bruxelles, Berlin, 등, 전 유롭이 불바다가 되는 현실에서, 초국가적으로, 신도들이 총동원되어, 천상천하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反戰과 勝戰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 독립을 열망하는 우리 겨레는,"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모두 매일 수없이 불렀다.
드디어 해방이 되자, 1945년 9월 8일 성모성탄일 축일에 미군은 한민족의 해방군으로서, 이미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서야 인천에 상륙하여 입국하였으며, 남한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정권 접수를 현실적으로 진행시켜, 다음 날 9월 9일에는 미군 지휘관들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사실, 소련은, Hyroshima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두하되어(1945년 8월 5일, 오전 11시), 일본의 패색이 확정되자, 3일 후, 소련이 비로서 대일 선전 포고를 한 후, 총 한방 쏘지 않고, 전투할 겨를도 없이, 일본에 대한 승전국이 되었으며, 북한 지역 점령에는 약삭빠르게, 미군의 서울 입성보다 한달 일찍 평양에 들어 왔다.
Spellman 대주교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서 2차대전 중에 전 세계를 순방하며, 전쟁 종식과 국제 평화정착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 육해공군 군종 총사령관으로서 전투현장들을 방문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던 차,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 하지 중장(Lt. General Hodge)을 대동하고, 9월 9일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일본의 조선총독부(중앙청)에서 하지 중장과 함께 일본 총독의 항복서명 문서와 함께 공식항복을 받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그 때까지만해도 일본이 잡고 있던 국내 치안 담당의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1945년, 9월 9일,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조선교구 설정 기념일, 오후 5시에는 즉시, Spellman 대주교가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함께 명동대성당에 와서 노기남 주교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내걸고, 사회 요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해방과 연합군 승리를 감사하는 경축미사를 바쳤다.이날 점령군 사령관 미국 하지 중장이 명동대성당 마당에서, 경성 시민들과 특히, 조선독립운동가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무뤂을 꿇고,조선인 노기남 주교의 손에 입을 맞추며 존경스러운 인사를 올리는 장면은 실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6.25 사변 후까지도, 우리가 대신학생 이었을 때도, 그 소문이 추억으로 되풀이되어, 노인 회장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일찌기,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을 전후하여, 이미 탁월한 역량을 지닌 스펠만 신부는 당시 로마에 머물면서 Paccelli 대주교(후에 교황 비오12세)와 함께 일하며, 한국 순교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수 년간 대한독립을 위하여 활약하였던 스펠만 대주교는 환영 답사에서, “79위 저 순교복자들 그림은 로마에서 본 낯익은 성화이며, 순교복자 성가도 귀에 익은, 들었던 것”이라며,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였다.
1945년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 79위 대축일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미 군정장관 Arnold 소장과 고급 장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2차세계대전 종식으로 세계평화 회복을 주신 천주님과 이를 도와주신 성모님께 감사미사를 드렸고, 하지(Hodge) 중장은 부득이한 정객들 면담으로 불참하는 대신 전쟁종식 경축 멧세지를 보냈다.
그런데 점령군 사령관 미군 장성들과 영관 장교들은 명동대성당 예식에 올적마다 성당마당에서 많은 국내 요인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 무뤂을 꿇고 노기남 주교에게 깊히 절하면서 노기남 주교의 손가락에 낀 반지에 입을 맟추었다. 이는 당시 한국 지성인들과 사회 요인들을 엄청나게 놀라게 하는 광경이었고, 서울 시내에는 그 소문이 한동안 자자하여 오래 갔다. 36년간 일본에 점령당하여 무시를 받아오던 한국인들은, “천주교의 빨간 치마 입은 남자, 주교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지위의 인물이기에, 의기충천하던 점령군 사령부의 미국 개선 장군들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한국인 노기남 주교에게 땅바닥에 무뤂을 꿇고 깊히 절하면서, 노주교의 손바닥에 입을 맟추는가!?”하며 놀라와 하였다. 천주학쟁이로 처형되던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의 위신이 급상승하였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노기남 주교를 제일 먼저 예방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서 Spellman 대주교와 G.M. Carrol 안신부와 재미 한국인 尹乙洙 신부, 및 중국 南京의 우빈(于斌) 대주교로부터 그동안 대한독립을 위해 받은 크나큰 특별 지원에 아주 진솔하게 정중한 감사를 표하였다.
만주 벌판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며 싸우던 우리 독립군들의 전투현장 외에, 세계 4대 강국 지도자들에게 직접 대면하여 수시로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말을 할 수 있던 사람은 미국 뉴욕 대교구장이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 특사였던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정치 고문이었던 南京 교구장 우삔 대주교 뿐이었다.
1945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는 1주일 전(12월 2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하나 둘씩 거의 모두 귀국하여, 여정을 풀자마자, 노기남 주교는 명동대성당에서 임시정부 요인들, 金九 主席과 金奎植 박사, 등을 위하여 환영미사를 함께 드렸고, 조국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그동안 임시정부의 피나는 역활과 노고와 희생에 감사를 드렸다.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 큰 공식행사로서는 유일한(?) 행사였다. 이미 정파와 귀국 일자, 등이 통일된 단일행사가 어려웠다.
이 날 환영행사 중에, 김구 주석은 공개적인 석상에서 답사를 통하여, 그동안 대한독립을 지원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그 정치 고문이었던 우빈 대주교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특히, 1943. 11. 27. Cairo 회담에서, 미국의 Roosevelt 대통령의 해외 미국 대통령 특사로 활약하던 스펠만 대주교의 성원은 지대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1945. 7. 26. 포스담(Potsdam), 회담에까지 장총통과 함께 참석하여, 회의참석자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장개석 등에게 회의를 전후하여, 약소민족의 자치권과 특히 대한독립을 역설해준, 천주교 Spellman 대주교의 지지와 성원에 깊히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일본의 속국 국민으로 숨을 죽이고 숨어다니던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으랴!
1945. 11. 1일, 천주교회의 위령의날 축일에는 노기남 주교가 명동대성당에서 2차대전 중에, 특히 오끼나와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전사한 연합군 전사자들과 특히 미군 전사자들 수 만명의 영혼을 위하여, 미 점령군 사령부의 민정장관 Arnold 소장과 많은 미군 장병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미사를 드렸다. 이때까지만해도,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을 미국처럼 생각하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각 정당 창당을 자유화하여, 공산당, 특히 남노당(南朝鮮勞動黨)이 발빠르게 조직화하며, 활발히 확대하여 나갈 때였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反共精神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북한의 공산당이 1945년 가을부터 북한 땅에 있던 여러 신부들과 수녀들을 체포하고, 교회 건물을 몰수하며, 천주교 박해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서울에서 精版社의 위폐제작 살포사건이 발각되면서 천주교회는 더욱 反共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1946년 성모성월의 5월 7일, 당시 解放日報, 人民報, 등 남한에서의 공산당 기관지 발행자들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화폐 인쇄소 치카자와인쇄소(近澤印刷所)를 발빠르게 차지하여, 精版社로 개명하고, 朴洛鐘과 宋彦弼, 등을 시켜 엄청난 위조지폐를 발행, 살포하여 경제대혼란을 일으켰으나, 곧 발각되어 체포되고, 曺在千, 洪以燮, 같은 저명한 검사 판사들에 의해 밝혀져, 주모자들은 미리 도피하고, 박낙종과 송언필 등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美軍政廳에서는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인쇄소 정판사를 당시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천주교회가 접수케 하여, 大建印刷所로 개명하고, 梁基涉 신부를 사장으로 임명하여, 출판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1947년 8월 1일부터 京鄕新聞(서울신문 전신).을 발행하게 되었으니, 이는 1906년에 창간하여 발행하여 오다가 일본이 폐간시켰던 京鄕雜誌의 복간 이상으로, 옛 月刊을 日刊으로 과감히 바꾼 발전이었다.
1946년 9월 16일, 김대건신부 순교기념일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3일간의 강연회, 음악회, 등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1935년에 일본이 폐지한, 韓國殉敎者顯揚會를 재결성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점령군사령부에서는 한국 民政權을 한국인들에게 이양하여, 民政長官에 安在鴻 씨가 임명되었는데, 국내 治安을 위하여, 立法議院 구성에 천주교 대표로 장면 선생이 추천되어 참가하였다.
1946년 10월 9일, 미국 메리놀회 Byrne 번 신부가 초대 한국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3일 후, 10월 12일에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주교는 환영미사를 드리고, 18일에는 미군정청과 천주교회가 古宮, 秘苑에서 환영 축하연을 공동개최하였다.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2년 전으므로, 로마 교황청이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Corea)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교황대사를 임명한 것이다. 따라서 대사로서 제출하는 신임장을 받을 우리나라의 국가 원수도 아직 없을 때였다.
1947년 7월 7일에는, 일본이 폐지시킨 조선 천주교 청년연합회를 재결성 확대개편하고, 요한 장면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며. 8월 5일에는 천주교 여성청년연합회도 결성하였다. 천주교회도 정치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때였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영향을 받는 공산당이 평양 주교좌 대성당, 원산 주교좌 대성당, 함흥 주교좌 대성당, 연길 주교좌 대성당, 신의주 성당, 등의 천주교 성당들을 빼앗아 인민위원회 건물로 쓰면서, 신부, 수녀들을 체포 구금하며, 박해가 날로 심해질뿐더러, 남한에서도 남한의 순수한 村民들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실로 조직력을 가진 공산주의자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대규모 放火와 폭동과 반란이 대구, 여수, 순천, 제주, 등 각처에서 그칠 날이 없어, 천주교회도 자발적으로 반공투쟁 노선에 앞장서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U.N. 감시하에 남한에서만 5천년 역사에 최초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 제헌국회의원들이 선출되었다. 천주교 대표로 장면씨도 당선되었다. 그러나 U.N.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한 북한지역은 자유 총 선거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 드디어 국회가 구성되었으므로 ,6월 20일에 노기남 주교는 모든 국회의원들과 정계 요인들을 초청하여 명동대성당에서, 대한민국 독립 축하 경축미사를 드렸다.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축하 답사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특히 미국 스펠만 대주교와 중국 우삔 대주교의 국제적인 지원활동에 대하여 천주교회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도 천주교회가 국가를 위하여 크게 이받이해줄 것을 믿고 기대하며 요청하였다. 뒤이어 제정된 헌법은 7월 17일에 선포하되었고, 이를 근거로 정부조직법, 12부 4처의 장관 임명, 등이 이루어져 대한민국 정부 조직이 우선 마무리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는 헌법에 근거한 정부조직법을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며, 절대다수 지지표를 받은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로마 교황청 외에 아직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 해 9월 21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U.N.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를 U.N.이 승인하도록, 대표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수석대표로, 장면 선생 외에 조병옥 박사와 모윤숙 여사, 김활란 여사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나라의 국제 관계가 전무하던 시절이고, 국가 재정역시 빈약하여, 우리나라는 외교의 황무지 개척에 천주교회의 지원으로 실로 기적과 같은 결실을 내게 되었다.
특히, 북한 공산당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수난하는 북한보다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남한 대한민국의 U.N. 승인을 위해, 천주교회는 로마 교황청과 대사관계를 맺고 있던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외교부와 모든 국제 조직을 총동원하였다. 당시 노기남 주교는 주한 교황대사와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에게 간청하여, 전 세계 70 여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로마 교황청의 지원과,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의 지원, 그리고, 메리놀회를 통하여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한국 대표단 3인의 업무를, 자기들 일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심지어 한국대표단 3인의 숙소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길 건너에 있는 Lutetia 호텔 2층에 잡아주었고, 사무실과 타자기부터 시작하여 모든 업무에, 특히 각 언론기관과 각국 대표단 도착일과 숙소, 초청, 면담, 신생 대한민국 정부 승인 설득 사전 섭외, 등 일체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파리 교황대사관과 함께 주선하여 주었다.
2차세계 대전 후 아직 전 세계 외교가의 질서가 정립되기 전이라서 U.N. 총회는 12월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U.N.의 승인을 받는 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봉사와 협력이 지대하였다. 한국은 늦었지만 마땅히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파리를 지날 때마다, 종종 Lutetia 호텔 1층 식당에 가서, 옛날, 장면 선생, 조병옥 박사, 모윤숙여사, 김환란 여사, 우리 정부대표들이 늘 식사하던 자리에 가서, 옛 일을 되새며 식사하고 오는 습관이 있다.
1948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축일에 절대 다수의 국가들이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승인하기로 확정하였으나 발표는 다음 날 9일에 하게 되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몇몇 국가들의 반대 외에는 자유진영 대부분의 국가들이 우리나라 신생 대한민국을, 자기네 나라와 같은 정식 국가로 승인한 것이다. 당시 국내의 공산당, 특히 서울의 남노당 진영에서는, 통일 후 남북이 같은 한 나라로 승인신청해도 늦지 않는데, 왜 남조선만 혼자서 국가로 승인을 받느냐고, 연일 유엔 승인 반대 대회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UN의 승인 후, 불과 1년 남짓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무섭고, 잔인하고 처참한 전쟁이 시작되자, 전 세계 50 여개 국가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지원하며,16개국에서는 전투병과부대 파견까지 하면서 참전하는데 있어, 1년 전 U.N. 총회의 승인은 여러 참전국들에게 참전의 근거와 합당한 이유를 주는 큰 힘이 되었다. 이 때 비로서 우리 선배 노인 사제들은 [성모님 축일의 신비로운 섭리]를 느꼇다고 한다.
1949년 1월 1일, 로마 교황청 다음으로 미국이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두 번째 나라가 되어, 한.미 국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 해 6월 14일에는 메리놀회의 Byrne 번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어 축성되고, 경축미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하여 3부요인들이 명동대성당 예절에 대거 함께 참석하였다. 이 해에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장면 선생은 교황청을 방문하고, 교황을 알현하였으며, 주미대사로 임명되면서, 미국의 3개 대학교로부터 차례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아, 그 이후로는, 국내에서도 “장면 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전후, 선배 성직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당시 한국의 저명한 지도자급 主要人士들이 천주교회로 입교하게 되었다. 몇몇 분의 예를 들어보자.
평소 백범 김구 주석과 대화를 나누며 천주교 입교를 논하던 박병래 박사(성모병원 원장)는, 1949. 6. 26. 김구 주석이 저격을 받아 위도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서, 운명 전의 金九 主席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대세를 받고 눈을 감고 운명하도록 도왔다.
그해 11월 20일에는 鄭春洙 목사(감리교 總理師, 3.1.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1인)가 개종하여, 바오로 본명으로 노기남 주교한테 영세하였다.
洪震(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장, 귀국 후, 非常國民會 議長) 의장이 南相喆 회장 권유로 입교 영세하였다. 계속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특히 전쟁 후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윤형중 신부가 맡아하는 신입교우들을 위한 교리강의에 매회 신규 모집 때마다 지성인들 6,7백여명씩이 청강하여 입교하였다.
六堂 崔南善 선생은, 3.1.운동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 중 독립선언문 초안자로 근대 우리나라의 大碩學으로서, 육당 선생의 천주교 입교는 한국 지성인들 사회를 크게 놀라게 하면서,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 1957. 11. 17. 영세 바로 다음 날, 한국일보와 당시 라디오 방송에, “나는 왜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改宗하였나?”라는 발표를 하여, 온 국민을 더더욱 놀라게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3일만에 점령되고, 수원이 1주일만에, 대전이 3주일만에 북한 공산당 인민군들 한테 점령되면서, 실로 많은 성직자들과 회장들이 체포, 감금, 고문, 처형되었다. 미국에서는 Spellman 추기경(1946년 서임)이 장면 대사를 도와, 미국과 U.N.이 공산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도록,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Carroll 몬시뇰이 한국 전쟁 난민 구호에 미국의 온 국민이 나서서 힘쓰도록, N.C.W.C.를 결성하여 지원하였고, 휴전 후에도, Spellman 추기경은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특히 성탄절을 전후하여, 휴전선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위문 격려하므로써, 과거 젊은 날 2차대전 중 연합군의 군종 사령관 시절의 정신과 사명을 잊지 않고 계속하였다. 후학들은 Spellman 추기경에 대하여 특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대한민국 건국사에 있어서, 천주교회 역활의 역사적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 정부 시절, 천주교회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인끼가 높아가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일부 특정 종교인들이 서서히 묻어버리려는 의도에 의해서 점점 더 가려지고, 잊혀지게 되었고, 이제는 아주 없어지게 되고 있다고 느끼는 동시에, 우리 천주교회 자체도 우리의 빛나는 교회역사를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데 너무나 소홀히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1949년 6월 말 현재 당시 한국 교세 통계와 2013년 현재 통계 비교.
1949년 현재, 전국 6개 교구에, 주교 6명. 한국인 사제 144명(2013년, 현재 4,647명), 외국인 사제 58명(현재 166명), 신학생 184명(현재 1,587명), 수녀 한국인 385명(현재 10,146명). 전국 본당 131개(현재 1,647개), 당시 서울의 본당은 14개(현재 226개), 신도수 북한 교우 10만내외 추산을 제외한 남한만의 신자 수는 15만 8천명(현재530만명이고, 영세예비 신입교우는 8,516명이다. 당시 서울시민은 150만(현재 1,200만) 내외였다.
그러나 해방 후부터 특히 1950년 6. 25 사변을 전후하여, 북한 공산군한테 체포, 구속, 고문, 처형된 성직자는 주교 5명, 사제 82명(그 중 5명이 김수환 추기경 동창생 신부들)과 수녀 35명, 대신학생들과 수사들 29명 등. 우리나라의 어떤 박해 때도 15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1, 2년 동안에 이처럼 150여명이나 처형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처형된 대부분 성직자들의 무덤조차 모르고 있다. 지금도 북한 땅에는 천주교 신부, 수녀가 단 1명도 없으며,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유홍렬 교수 저, 한국천주교회사 下卷 1962. 참조, Catholic Encycloped. 1965. etc.,,,참조.-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
지금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점점 전쟁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로서, 북한의 계속적인 핵무기 개발,시험으로 우리나라는 강대국들의 각종 신무기들이 집합하여 대목장이 서기 시작하는 가운데, 최근 서울과 대도시에서는 '대통령 탄핵 촛불 시위'와 '탄핵반대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가 대대적으로 연일 개최되고 있읍니다. 한편에서는 국정농단이라고 대통령이 하야하라고 野壇法席이고, 반대편에서는 음해라며, 시위목적이 대통령 하야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國力 弱化와 無力化로 국가 정권과 조직의 瓦解로, 국가사회를 스크램불(scramble)을 만들어, 혁명을 향한 반역적 선동이라고 맛서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의 같은 국민으로서 같은 한 형제들이니, 결코, 서로 미워하거나, 심지어 같은 종단 안에서조차 편가르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愛國心과 民族愛가 결여된 대회는 당파적인 선전과 선동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왕국이 망하고, 大韓帝國마져 국운이 風前燈火같던 시절, 천주교회는 우리 민족정신을 지키고, 가꾸고, 아끼며, 일깨우기 위하여,'1905년부터, 국내에서 최초로 유일하였던 월간지 정기 같행물, '경향잡지'에 매월, '대한셩교샤긔(大韓聖敎史記)'를 큰 제목으로 하여 연재하였으니, 15년 후,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1920년에 상해임시 정부가 결성되면서,'大韓帝國'을, '大韓民國'으로 국호를 확정하기 훨씬 이전이었읍니다.
천주교회는 우리나라, [大韓]을 끈질기게 인정하고, 지키고 있읍니다.
당시 국내 많은 선비들은, '朝鮮'이라는 국호 사용에 젖어 있던 시절, 천주교회는, 옛날 한반도의 '三韓'을 포함하는,'大韓民族'을 의미하는 '대한셩교샤긔'를, 큰 제목으로하여 경향잡지가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매월 특필대서하여 사용하였읍니다. 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은 함흥교구, 연길교구, 평양교구, 등을 설정하며 교구장 주교를 임명할 당시, 지금의 北間島 뿐 아니라, 西間島와 東間島, 등을 지금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와 연결된 대한제국 관활로 삼아, 두만강과 앞록강 건너, 만주 쪽으로 100 km ~ 150 km 내외를 오늘의 兩江 國境을 무시하고,우리 대한민족의 거주지로 삼아 교구 경계를 삼았음은, 약소민족이었던 우리나라를 위한 교황청의 합리적인 정책에 우리는 모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종교단체에서, 애국가 봉창이나 태극기 게양을 꺼리지만, 우리나라 애국가는, "하느님이 保祐하사, 우리나라 만세"에서 보듯이, 하느님께 바치는 유신론적 사상을 지닌 나라의 國民的 祈禱"이며, 愛國歌에 이러한 국민적 기도가 포함된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주 못되고, 고약한 이웃 강대국들의 침략의 칼날을 우리 힘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우므로, 몸부림치며, 하느님의 힘을 청하면서,민족의 정신적 단결을 부르짖는 애절한 표현이며, 또,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에서 보듯이, 선조들과 후손들과 이웃을 사랑하는, 건전한 민족주의 정신으로서, 매우 거룩한 노래로 된 온 국민의 기도입니다.
이런 우리민족의 국민적 애절한 기도의 결과로, 아시아의 최강대국이었던 일본을 반대하며, 당시 세계 4대 강국,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국가 원수들에게까지 수차례 직접 대한독립을 거론하며 제안하던, 뉴욕대교구장 Spellman 대주교나, 남경의 우삔 대주교 같은 분들이 하늘의 使者처럼,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제연합, U.N.의 승인을 받도록, 당시 전 세계에서 70여개 나라와 가장 많은 대사관계를 맺고 있던, 로마 교황청의 후원이 가능하였으며, 6.25 기습남침으로 대구,부산 외에 남한 전체가 점령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이 살아 남아서, 오늘날 같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또 7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하고 엄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서는, 매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월례 촛불 기도회 때마다, 또 큰 행사 때마다, 애국가 봉창을 항상 4절까지 전 신도들이 불렀고, 대한민국 만세, 한국천주교회 만세, 등 만세3창을 지난 1985년 경부터 30여년 넘게 매월 불러왔으며, 큰 행사 때는 물론, 매일 24시간, 태극기와 교황기를 매일 24시간 게양하여 온 것입니다. -Msgr, Byon
<유홍렬 교수 저, 한국천주교회사 下卷 1962. 참조, Catholic Encycloped. 1965. etc.,,,참조.- 柳洪烈 박사 著, 한국천주교회사, 下권, <제111장, 민족의 해방과 교회 발전> 1962. 가톨릭출판사 발행, 및 CATHOLIC ENCYCLOPEDIA FOR SCHOOL & HOME, vol. 10. 1965, McGRAW-HILL BOOK COMPANY, New York, London, et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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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