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은 1831년 조선교구(대목구) 설정 기념일인데,
순교 선조들의 피로 물든 신유년 박해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조선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을 놀라게 하였고, 차관 Cappellari 대주교는 조선의 정하상, 유진길, 등, 조선교회 창립선조들의 2세 평신도 지도자들이 올리는 애절한 성직자 파견 청원서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사목자들로서의 직무유기를 반성, 자책하였으며,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이 되자마자, 얼마 안되어, 바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되어, 1831년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였습니다.
교구설정 관례를 따라, "서울교구"나, "한양 교구" 로 하지 않은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Corea라는 나라 이름과, "서울", 혹은, "한양"이라는 수도 이름들을 잘 모르고 있었고, 그 식별이 혼동되었기 때문으로 교회 史學人들 대부분이 추정하고 있읍니다. Corea 대목구가 1911년 서울과 대구로 분리되면서, [Corea 교구]명칭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파리외방 전교회의 주교님들은 신도수가 많치 않은 데도, 서울과 대구를 분리하고, 이어서 계속하여, 1, 2 만명의 신도수를 가지고도, 교구를 분리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동시에, 그 어렵던 시절에 명동대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성당들을 건축하였습니다. 파리외방 전교회에에 감사를 드립시다.
짚신을 신고 북경 3천리를 가고 오며, 박해를 피하여 심산궁곡으로 피신한 교우촌을 방문하며, 가난과 추위와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교구설립을 주선한 우리 신앙선조들의 희생과 노고를 9월 9일 하루만이라도 전국 교회가 함께 되새기며, 감사와 찬미와 기도를 바치는 계기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초대 교구장 Brughiere 소주교님의 묘는 중국 땅 산골 마을 공동묘지 무성한 수풀 속에 뭍혀 있었는데,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이 되던 해,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서, 서울, 마포 산 언덕, 용산 옛 신학교 터 뒤 언덕에 폭 70cm X 길이 120cm 정도 되는 얇은 돌판을 이불삼아 덮힌 평장 묘에 모셔져 있습니다. 서울 대교구장 Muttel 민대주교 묘를 비롯하여, 초대 파리외방전교회 주교, 신부들, 특히, Ridel 이주교, 명동성당을 건립한 Eugenio Kost, 고신부, 등, 선종 순서대로 나란히 모두 평장되어 있습니다. 후대 우리 한국 주교, 신부들의 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뿌리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터 없는 집이 어떻게 서 있을 수가 있으랴?! - Msgr. By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