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어디까지 와 있나?
어디까지 와 있나?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사전 읽기-
|
|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 -성탄절의 회고와 묵상 !!!-
大韓民族100년계획 天眞菴大聖堂 건립 조감도<1979~2079>
성탄 ! 성탄 !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아들, 갖난아기로 태어나셨읍니다. 사람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성탄 ! 성탄 !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의 Yamousscro에 건립된,
평화의 성모 대성당 건립현장 견학 회고 !
|
1989. 3. 24일,건축공사 당시의 야무스크로 대성당 조감도.
|
|
야무스크로 대성당의 중앙제단을 향한 7,000 좌석과 직경6m, 기둥 279개, 약 3만명 수용, 중앙 돔직경 90m, 1986년 착공, 1990년 완공,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축성. |
|
<아프리카 야무스크로 대성당 건축과정을 1주일간 머물며 돌아보는 변기영 신부(1989년 3월 24일,당시 49세)>!
1986년,대성당 착공 당시 야무스크로의 인구는 불과 2천여명, 주변지역까지합쳐서 겨우 4천여명에 불과하였으나,1990년 聖요한바오로 교황의 방문과 준공식 거행 후, 수도를 당시 150만 인구의 아비쟝에서 야무스크로로 이전하면서, 2011년 현재 30만명이 되었다. 부와니 대통령은 소년시절 천주교로 개종한 후, 프랑스 파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 2회, 장관 1회를 역임하였다.
특히, 국회의원 출마 때, "프랑스 국민 여러분이, 나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면, 나는 파리의 프랑스 국회에 들어가서,우리나라 코트 디 봐르의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추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이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숲속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며 외치던 그를, 파리시민들은 2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시켰고, 귀국 후, 독립을 완수하였다.불가피하게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로 집권을 연속한 부와니 대통령은 거의 1당체재로 통치하면서, 거의 40여년 가까이, 빵 값을 한번도 올리지 않기로 유명하여, 이웃 나라에서 밀입국하는 굶주린 밀입국 인구증가로 골치를 앓았다.
대대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부와니 대통령은 천주교 신앙으로 열심한 그의 어머니, 막달렌 여사의 기도와 함께, 수백만평의 사탕수수밭과 커피 밭을 팔아,야무스크로 대성당 건립에 주력하였고, 외채가 많은 나라에서, 2억 달러나 들여가며, 대성당을 건립한다고, 당시의 프랑스와 유롭 언론에서는 거의 매월, 매주 비평과 비난이 계속 극심하였다. 건축회사는 프랑스회사였다. 야무스크로 평화의 성모 대성당이 건축되던 그 당시 전국 인구는 약 850 여만명 중에 천주교신자는 인구의13%에 불과하고, 이슬람과 각종 동물숭배 신앙을 가지고 살던 각양각색의 토착민들이 많았으나, 필자가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을 만나보며 이야기해보니, 모두가 유롭에서는 만나보기 쉽지 않은, 천사같은 착한 사람들 같았다.부와니 대통령의 집권과 통치로, Cote d'Ivoire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코트디 봐르 독립의 아버지 라고 칭하는, Felix Hoophouet Boigny 대통령(1905~1993)이 주도한 대성당 건립은 착공 때부터 완공 때(1986~1990)까지, 유롭 언론의 끈질긴 반대와 비난으로, 그 나라 국내 교회도, 심지어 주교나 신부나 수녀들도, 건축현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다.성직자로서는 필자가 최초라는 말을 현장에서 몇번 들을 정도였다.그래서 착공 미사도 못 올린 대성당이 완공되자, 낙성식 미사도 드릴 성직자가 없었으나, 용감하신 聖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유롭 언론들의 비난과 반대를 무릎쓰고,무더위 찜통 기후를 어려워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1990년 9월 10일, 현지을 방문하여, 대성당 축성식 미사를 드리며,유명한 강론 말씀을 교회 안에 남겨주셨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성전 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天主님의 성전(聖殿)은 地上에서 天主님의 표지(標識)다! (Templum Dei est signum Dei super terram !)" - Msgr. Byon-
|
|
270개의 기둥 중에 일부 주요 기둥 속에 설치된 층계
<아프리카 야무스크로 대성당 건축과정을 1주일간 머물며 돌아보는 변기영 신부(1989년 3월 24일,당시 49세)>! |
|
컴퓨터 상의 영상도면을 따라 설계되고 제작된 중앙제단과 천개 |
|
야무스크로 대성당의 천개와 컴퓨터 영상
1986년,대성당 착공 당시 야무스크로의 인구는 불과 2천여명, 주변지역까지합쳐서 겨우 4천여명에 불과하였으나,1990년 聖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과 준공식 거행 후, 수도를 당시 150만 인구의 아비쟝에서 야무스크로로 이전하면서, 2011년 현재 30만명이 되었다. 부와니 대통령은 소년시절 천주교로 개종한 후, 프랑스 파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 2회, 장관 1회를 역임하였다.
특히, 국회의원 출마 때, "프랑스 국민 여러분이, 나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면, 나는 파리의 프랑스 국회에 들어가서,우리나라 코트 디 봐르의 독립운동을 합법적으로 추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이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숲속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며 외치던 그를, 파리시민들은 2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시켰고, 귀국 후, 독립을 완수하였다.불가피하게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로 집권을 연속한 부와니 대통령은 거의 1당체재로 통치하면서, 거의 40여년 가까이, 빵 값을 한번도 올리지 않기로 유명하여, 이웃 나라에서 밀입국하는 굶주린 밀입국 인구증가로 골치를 앓았다.
대대로 부유한 집안이었던 부와니 대통령은 천주교 신앙으로 열심한 그의 어머니, 막달렌 여사의 기도와 함께, 수백만평의 사탕수수밭과 커피 밭을 팔아,야무스크로 대성당 건립에 주력하였고, 외채가 많은 나라에서, 2억 달러나 들여가며, 대성당을 건립한다고, 당시의 프랑스와 유롭 언론에서는 거의 매월, 매주 비평과 비난이 계속 극심하였다. 건축회사는 프랑스회사였다. 야무스크로 평화의 성모 대성당이 건축되던 그 당시 전국 인구는 약 850 여만명 중에 천주교신자는 인구의13%에 불과하고, 이슬람과 각종 동물숭배 신앙을 가지고 살던 각양각색의 토착민들이 많았으나, 필자가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을 만나보며 이야기해보니, 모두가 유롭에서는 만나보기 쉽지 않은, 천사같은 착한 사람들 같았다.
부와니 대통령의 집권과 통치로, Cote d'Ivoire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필자가 1990년,아프리카 초행길에 아비쟝을 갈 때, 한국 내의 박고안 신부님의 제자 임베드로 사장님의 집에 초대받아, 안내와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곳 본당신부는 더운 나라라서 벽은 없고 기둥과 지붕만 만드는 성당 건립을 10년째 건축하고 있었으나, 신자들은 숲속에 사는 사람들이라서, 모두 천사들처럼 몸둥이 뿐으로, 필자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며, 나역시 무일푼이어서, 귀국 후에 우리나라 부자 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님 주소를 알려주며, 지원 요청을 해보도록 하여, 김수환 추기경님이 후에(2년 후쯤?), 1만불을 보내주었다고 들었다. 그 시절 8월(1990년?) 초, 아비쟝의 Yago 추기경님이 Dakuri 보좌주교와 함께, 평신도 복장을 하고, 조용히 천진암 성지를 방문, 5위 성현 묘를 참배하고 간 적이 있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코트디 봐르 독립의 아버지 라고 칭하는, Felix Hoophouet Boigny 대통령(1905~1993)이 주도한 대성당 건립은 착공 때부터 완공 때(1986~1990)까지, 유롭 언론의 끈질긴 반대와 비난으로, 그 나라 국내 교회도, 심지어 주교나 신부나 수녀들도, 건축현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다.성직자로서는 필자가 최초라는 말을 현장에서 몇번 들을 정도였다.그래서 착공 미사도 못 올린 대성당이 완공되자, 낙성식 미사도 드릴 성직자가 없었으나, 용감하신 聖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유롭 언론들의 비난과 반대를 무릎쓰고,무더위 찜통 기후를 어려워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1990년 9월 10일, 현지을 방문하여, 대성당 축성식 미사를 드리며,유명한 강론 말씀을 교회 안에 남겨주셨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성전 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天主님의 성전(聖殿)은 地上에서 天主님의 표지(標識)다! (Templum Dei est signum Dei super terram !)" - Msgr. Byon-
**************************************************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떻게 되어가고 있고, 또 어떻게 되어가야 하는가? ① 槪括
천진암대성당 건물이 왜 빨리 올라가지 않느냐고 많은 이들이 재촉하며 야단이다. 빨리 보고 싶고, 들어가서 기도하며, 미사드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른 나라에 이미 건립되었고, 일부는 아직도 진행중인 1,000 여 곳이 넘는, 많은 대성당 건립 과정과 기간에 비하면, 우리나라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온갖 어려움과 공격적인 비협조 속에서도 정말 기적적으로, 가장 빨리 진척되고 있는 편입니다.
특히,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 건설을 반대하며 싫어하고, 천주님을 증오하며,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앙을 무력화시키려는, 악하고 독한 일부 반가톨릭인들이 끓고 타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심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궁리하며,실로 차마 일일히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잔꾀와 온갖 모략으로 충만한, 아주 못된 훼방꾼들의 고약한 반대와 방해와 억지가 그치지 않는 이 시대사회와 유명무실한 일부 종교계의 무지 속에서도, 더구나 최대의 비협조를 아낌없이 베풀면서, 직무 태만과 직무유기를 밥먹듯하는 관계인들이 들끓는 가시덤불 속 같은 이 시대사회에서도,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우리나라와 우리민족과 우리교회를 위하여, 꾸준히,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진척되어 가고 있읍니다. 천주께 감사를 드립시다. 신앙과 신심은 돈보다 힘이 있고, 세도보다 끈질긴 것입니다. 순교역사가 증언하고 있읍니다. 어느날엔가 한국인 출신의 로마 교황이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준공식 미사를 집전하며 축성,봉헌하는 기적의 날이 태풍처럼 다가오고 있읍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 될,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의 기초와 골조와 지붕까지만의 공사비는 현재 물가 기준으로 약 1천 500억 내외로 추산됩니다만, 이 때부터 건축하면서 부분적으로는 한편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사실 공사기간 5년 내외이면, 기초와 골격과 지붕은 완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석벽과 조각과 장식은 50여년 이상 걸릴 것입니다. -
근년에 완공된 아프리카 Yamousscro 에 착공 5년만에 완공된 평화의 성모 대성당 건축비는 2억 달러, 미국 로스안젤리스에서 착공 7년만에 최근 완공된 천사의 모후 대성당은 2억 3천만달러,착공 5년만에 1999년 완공된 소련의 모스크바 구세주 대성당은 황금으로 내부 천정과 외부 돔 지붕을 입히느라 7억5천만 달러(?) 이상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예술적 조각품들과 1톤 이상의 황금으로 내외를 입히는 등, 최상의 예술로 금은 寶石物, 등으로 천주께 드리는 정성을 미루고 피하면서, 좀 검소하고 단순하게 하면, 3천평 내외의 대성당 실제 건축 완공에는 대개가 2억 달러 미만 소요 됩니다 ! 우리 모두 기도하며 한 번 해봅시다!
매우 장기간 지속된 한 두 곳의 예를 들면,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대성당은 터닦기에 400 여년(930년 착수~1,330년 완료), 건축에 600 여년(1,330년 착공~1,925년 낙성), 약 1,000년 넘게 걸렸읍니다. 로마의 사도 성 베드로 대성당은 354년 완공된 첫 대성당이 1000 여년간 사용되다가 붕괴 위험이 계속되어, 1450년 경 설계도 작성에 손을 대면서, 중앙부분부터 일부 철거와 착공을 시작, 1506년 두번 째로 현재의 새 대성당이 정식 착공된 후, 330 여년 걸렸으나, 아직 미완성이고, 독일 꾈른대성당은 1160년 경 착공된 후, 지붕 없이 400 여년, 지붕 하고나서 400 여년, 약 800 여년째 계속 사용하면서 지금도 공사 중에 있읍니다.
수 백년씩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속의 국가 정권들은 수없이 바뀌어 왔고,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사상과 예술도 변하여 왔으며, 신자들의 신심과 열심도, 더웠다 식었다, 하며 달라졌지만, 천주님 공경하는 신앙심은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한결같이 꾸준히 이어오며, 계속 성장하여, 주님의 큰 집, 대성당을 쓰면서 지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정신적인 건축물은 건축과정에서도 나라와 겨레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아끼며 가꾸어 나가는 수호신입니다.
대성당 건립은 인간들의 돈이나 권세나 조직이나 예술이나 행정 기술이나, 관심이나 의욕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느님의 성전은 성신의 감도로 교회 하느님 백성들의 신앙심에 의해서 시작되고 계속되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한 대성당 건립은 천주교 신앙 토착화의 결정적인 단계로 보는 것이 역사를 바로보는 史學人들의 인식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표지다.!(Templum Dei, signum Dei super terram' -
1990년(?), <아프리카 코트 디 봐르의 야무스크로 대성당(3만여명 수용) 낙성식 미사 주례차 현장 방문한 聖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강론 내용>
唐나라 시대에 中原과 요동 지역에는 景敎, 또는 十字敎라고도 부르던 그리스도교의 한 교파가 주로 당나라에 전파되어, 약 3천여개의 본당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오고 있으나, 지금은 大小 景敎碑 정도 몇개 외에는, 경교의 신앙 자체도 한 때 스쳐가는 바람처럼, 남은 것이 없으니, 대성당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500 여년 동안 이씨조선의 抑佛崇儒 정책으로 불교가 수난을 당할 때, 법주사,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같은 5 大 사찰들은, 조선 불교 생존에 있어서뿐 아니라, 나아가, 몽고족 대란이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현대에 들어오면서 倭賊들의 침탈에 있어서, 국난의 위기에도, 살생을 엄금하는 불교 스님들이 수천명씩僧軍을 자발적으로 결성하여 창을 들고 몽고군과 왜군을 무찔렀으며, 자신들을 억압하는 조선 왕국을 위한 護國佛敎의 위대한 역사적 교과서를 우리에게 남겨주기까지 하였읍니다.
고려 때 몽고족의 침략 대란 중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김윤후 스님이 용인 處仁城(현재의 남사면 아곡리), 城內가 겨우 3천여평 밖에 안되는 작은 土城을 에워싼 몽고군 부대의 사령관 살례탑 장군을 사살하던 용력이나, 서산대사 사명당 등, 임진란 때의 호국 스님들의 道力이나 덕망 외에도, 전국 불교의 여러 큰 사찰들은 국가수호의 본거지로서 護國佛敎의 큰 힘이 되었읍니다.
대성당의 건립과정은, 그 시작이나 완공 못지 않게, 건축과정도 보다 더 거룩하고 중요한 것이니, 천진암대성당도 건물이 올라가기 전에, 지난 40여년 간, 터전과, 주변 배수로, 하천과 주변 기반 시설, 성역내 신도들 이동공간, 순례자들 신심 예절단의 이동 공간, 상수도와 하수도와 저류지, 조림, 등,,,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얼마나 많은 공사와 행사가 지금까지 그칠 줄 모르고 끝없이 여기에도 있어 왔는지,,,! 이러한 과정들을 돌아보면 실로 땀을 씻는 수건을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한숨이 저절로 길게 나옵니다.!
그동안 5위 성현들의 묘역 조성과 수녀원, 연구원, 박물관, 외에도, 토목 공사와 건축공사, 순례객 관리, 등에 임시로 불가피한 60 여평씩 되는 일시적인 가건물 시설들, 창고나 사무실만도, 짖고 헐어 옮기고, 다시 짖고, 또 헐어 고치고, 거듭한 것들이 13 동이나 됩니다. 큰 돈이 없으니, 일식(一式)으로 한번에 못하고, 재정상의 큰 부채를 피하며, 조금씩 하나 하나 해나가다 보니 이럴 수 밖에 ! 심지어 40 여년이 되도록 아직도 사제관 없어서, 사제들이 많을 때는 4, 5명씩 되는데, 여기저기 숙직실이나 임시 거처에서 지금도 그냥 살아가면서 일하고 있음니다.
36년 전만 하여도 천주교회 소유의 토지가 단 한평도 없던, 이곳,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그동안 화전하던 토지나 산 자락까지, 조각 땅 270 여 필지를 하나 둘씩 매입하여 모아서, 현재 한 덩어리 36만 여평이 되었고, 거듭된 10 여년간의 무사고 터닦기 공사로, 3 만여평의 대성당 터 수평 대지가 중심부에 2단계로 이루어졌으며, 국내외 최상의 저명한 전문 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15 년 여에 걸쳐 입안된 설계도가 확립되고 다듬어져 마침내 완성되고, 지방 행정 기관의 어려운 건축허가와 함께, 교황 聖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몸소 親作하시고 친필 서명하신, [교황강복문]이 하사되어, 마침내 착공되고, 30 톤 통돌에 조각, 완공, 안치되었으며, 또한 100 톤의 통돌 중앙 제대석이 마련되어, 로마 교황대사 대주교와 아시아 및 북남미 대주교들이 참석하여 함께하는 정초식, 축성식, 등을 거행하였읍니다.
대성당은 순례하는 이들과 관광하는 이들을 거룩하고 올바르게 淨化하며 聖化시키므로써, 국가와 민족의 정신적 聖德 敎育場이 되고, 지주가 되고, 千年 세월을 두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하느님의 보우하심과 백성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터전이 되며, 종종 계속되는 경제 불경기 속에서도 끊임없는 신앙의 순례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도 국내외의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므로써, 국가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관광자원 확보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됩니다. 해외 여러 성지 순례자들은 대성당 참배를 최우선으로 하여, 반드시 빼놓지 않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유롭에 가면, 으레 대성당 참배가 여행 주요 순서로 되어 있읍니다.
유롭에서 빈국이던 폴투갈의 빈민촌 Fatima 성지는 2년 전 15,000여명 수용하는 두번째 대성당이 준공되었는데, 매년 5백 여만명 이상의 국내외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다녀가면서, 폴투갈은 주변에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국제적 기반 편의시설로, 연간 25억 불 내외의 관광수입을 얻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1인당 2주간 체류하며, 평균 5천불내외 사용 추산), 프랑스도 서남부의 피레네 산맥 심산궁곡의 극빈 지역, Lourdes 성지에는 대성당이 4 동째 완공되어, 매년 6 백 여만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프랑스는 연평균 30 억불 이상의 관광 수입을 얻게 되자, 중앙 정부는 그 험한 산맥의 실로 난공사 지형을 무릅쓰고, 가까운 읍내 Tarbre 에까지도 떼제베 고속 기차 철로까지 수백 km를 연결하였고, 성지에서 16 km 이상의 지점 산맥 입구 읍내 Pau에는 작은 국제공항까지 개설하였읍니다. 20 여 차례 유롭 각 성지를 순례하던 필자도, 스페인 Madrid에서 비행기로 파리를 경유하지 않고, 작은 여객기로 30 여분만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Pau 공항에 내려서 Lourdes에 다녀 본 적이 있읍니다.
관광수입은 원자재 구입비나, 과중한 공장 건설비나 가공비, 포장, 선전 광고비, 운반비, 등이 필요없는, 거의 전액 순수익으로, 이태리와 폴투갈, 스페인, 프랑스, 등의 국민들의 최대 수입원입니다. 열강들의 대량살상 무기 제조 밀매 수익처럼, 핵폐기물 처리, 등의 위해잔여물도 없는, 영구적 문화 수익사업입니다. 무력에 의한 수입이 아닌, 문화력에 의한 민족현양 수익사업입니다. 이러한 국익 장기 사업을, 이 시대는 어찌하여 무능하고 못난 시골 신부들 한 두명의 어깨에 얹어놓고, 수수방관하며, 심지어 일부는 훼방이나 일삼으며 최대의 파괴적인 비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는지 !!?
한마디로, 100년 장기 계획의 대성당 건립은 신앙심이나 애국심을 키우는 국민정신 면에서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건전하고 거룩한 수익성이 있는 사업입니다. 천주교회는 비영리단체로서 천진암대성당 건립에서 얻는 모든 수익사업은 국가와 지역 사회가 챙기고 취하는데, 우리 시골에,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대국 사람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지만, 재주부리는 곰에게도 공마단 주인 대국 양반은 곰에게 먹이와 휴식을 주기라도 하고 있음을, 이 시대 우리 사회는 알고나 있는지?!
역대 교황님들이 공인하고 격찬하는 한국천주교회의 自發的인 創立史 現場, 특히,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한국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며 자발적으로 세운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대성당은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세계화시키는, 빛나는 민족정신사업이 아닐 수 없으며. 그동안 그칠 줄 모르고 닥쳐오는, 실로 얼마나 많은 난관들을 교회는 지금까지 극복하며 나왔는가 !
이 시대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한 역사적인 기념사업에, 물심양면으로 함께하지는 못할 망정, 사사로운 개인들의 무리한 폭리추구를 위하여 억지 시도나 무경오 시도를 위하여, 욕심과 투기심으로 종종 최대의 비협조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과, 일부 무법자들의 불법까지 계속 끼어들어, 떼를 쓰며 억지를 부리는 서글픈 시대 !!! 無經緯와, 온갖 비난과 비평과 반대와 훼방, 등을, 장애물 경기하듯, 교회는 실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서운 인내를 가지고 계속 허덕이며 이를 거듭 극복하면서, 주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꾸준히, 줄기차게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전국 순례자들의 성금으로 이렇게 되어 가고 있읍니다.
'100년 계획' 이란, 99년 다음 100년이라는 수학적인 의미의 100년이 아니니, 100년 계획이라고 하여, 게으름을 피우지ㄷㅗ 않고,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누가 박수를 쳐준다고 일하는 실무자들이 우쭐대지도 않고, 손가락질한다고 시무룩해 하지도 말아야 하겠읍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아, 교회는 오늘도 여기 주님의 집 건축 현장을, 우리의 殉敎現場으로 삼고, 우리의 殉敎刑場으로 믿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같은 발걸음으로, 후퇴나 정지나 노선 이탈을 모른 채, 한 걸음씩 내딛고 나아갈 뿐입니다 ! 흐르던 땀이 마르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라도 다할 때까지 바치려는 각오와 결심으로, 전국의 천진회원들은 자자손손히 계속 해 나가고 있읍니다.!
지난 1989년 아프리카 아이보리 코스트의 야무스크로(Yamuscro) 대성당 건립 현장을 며칠간 답사하면서(현재 완공, 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祝聖), 필자는 아프리카 구원의 희망과 신앙을 實感하였었읍니다. 인구 4천여명의 작은 시골 면소재지의 허허벌판이었던 야무스크로는 1990년대 초에 당시 인구 150만의 아비쟝 대교구에서 분리 독립되어 바로 교구로 승격되었고, 현재는 대주교 1인과 보좌주교 2명이 상주하는 큰 교구가 되었으며, 아프리카의 유일한 최고의 현대적인 명승지가 되었읍니다.아프리카의 천주교 신앙 토착화의 중심이 되었읍니다.
130 여년 전, 1886년 봄, 서울 명동 대성당(427평, 1천 500여명 수용) 터닦기가 착공될 때, 우리 나라에는 교황청에 보고된 전국 신자들 수가 1만 4천 5백 여명뿐이었고, 사제들은 모두 10명, 주교 1명, 성직자들은 모두가 프랑스 선교사들만 11명 뿐이고, 수녀들은 단 한명도 없던 시절, 서울 장안에는 천주교 신자 수가 불과 250명~300여명에 불과했었는데, 이제 만시지탄이 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적어도 수도권에 대성당 하나쯤은 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극심한 난관을 극복하며 명동대성당을 건립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에 감사를 드립시다. 명동대성당 건립이 없이, 지나간 100년의 세월을 생각해봅시다.!!
선조들의 殉敎 鮮血도 이를 재촉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할 수 있는 것(기도와 강론)을 함께하여 봅시다. ① - 추후 계속 - Msgr. Byon- |
|
|
성탄 ! 성탄 !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아들, 갖난아기로 태어나셨읍니다. 사람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성탄 ! 성탄 ! 2015 성탄절에- Msgr. Byon-
*************************************************************************************
천진암 성지 개척이 지역사회 경제활성화에 관광자원이 되었다. !!!
- 위대한 정치가들과 유능한 행정관들, 훌륭한 공무원들의 공헌을 되새기며,,,! -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는 경기도 광주 산맥의 주봉이 되는 앵자산의 서북쪽 광주군의 퇴촌면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한 명산이라 광주 8경 중의 2경이지만, 산악지대로 농경지가 매우 적고, 주로 산 사태의 토사가 많아 토질이 비옥하지 않으며, 산업시설도 없어서, 퇴촌면, 특히 광주산맥 주봉이 되는 앵자산, 무갑산, 관산, 등 심산궁곡의 관음리 우산리 무갑리 지역민들은 농경지도 소득도 충분치 않아 어려움이 많아서, 산 비탈에는 지금도 火田하던 흔적들이 적지 않다. 급경사면의 경작지화를 위한 화전 밭은 장마철 산사태나 토사의 원인이 되어, 중앙정부의 산림청에서는 조림을 서둘러서, 아시바 감으로 낙엽송 묘목을 심게 하였다. 그런데 곤지암에서 퇴촌, 분원에 이르는 경안천과, 양평에 이르는 한강에는 교량이 없어서, 퇴촌면과 남종면은 국도에서 고립되어 불편이 극심하였다.
특히 주변 도로가 없어서, 분원, 두미 나루터와 마재, 등에 소금배가 운용되던 시대에, 1961년 5.16 군사 혁명 정부는 서울에 전기가 부족하여, 수력발전과 수도 서울의 수해 예방을 겸한 팔당 댐 건설 공사를 추진하였고, 공사용 트럭 통행을 위해, 임시 도로를 우선 번천에서 두미까지 일방통행로를 개설하여, 경안천 서안, 도마치, 이성리, 두미 나루터, 아랫 두미 강가에까지 마차 통행이 좀 수월하게 되었다.
팔당댐 건설 기공식(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사진 제공.- 서울의 전력 수급과 우기 서울의 홍수 피해 예방을 주목적으로 건설된 팔당수력발전소 건설 공사는 국가적으로, 특히 수도권의 한강 수계 안전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국토건설사업이었으나,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개척과, 특히,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위한 기반시설-진출입로 확장 개설, 등에도 미리 초석이 되는 하느님 안배의 손길이었다. 앞으로 설명할, 천진암대성당 건립을 위하여, 하늘이 미리 섭리하신 국토건설사업이었다고 확신한다.-Msgr. Byon
팔당댐 건설 기공식 중 박정희 대통령의 기공식 기념식사 (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 기공식(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金光彦 촬영
팔당댐 건설(1966년 착공~1973년 완공) 위 사진 중, <한국전력주식회사 팔당댐 수력발전소 건설공사> 기공식 중, 박정희 대통령의 기공식 기념식사-물길이 치솟는 지점은 지금의 팔당 댐 남쪽 시작 지점이고, 물길 뒤로 약간 오른 쪽은 아랫 두미 마을이다. 30여 면의 사진들은 자료실에서 추후 볼 수 있음.<한국전력주식회사(한전)의 팔당댐 수력발전소 공사 기공식 당시(1966년 6월)부터, 팔당건설사무소 현장에 근무하던 직원, 젊은 날의 金光彦 촬영 제공>
우리나라가 전력부족과, 특히 매년 연례행사처럼 겪는, 장마철 많은 인명피해를 내던 서울 한강의 물난리 수해 방지를 위하여, 1964년(?) 초여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팔당댐 건설 후보지 현장 점검(?)을 겸하여, 한강 서울 상류의 남한강, 북한강, 경안천이 합류하는 남종면 분원 주변과 퇴촌면 강변을 둘러보면서, 퇴촌면의 도마리 냇갈 가에서 시골 농부들이 천렵(川獵?)하듯, 아주 소박하게 민물 매운탕으로 점심을 하였는데, 개울 건너 광동리를 바라보며, 농민들이 경안천에 임시로 만들어 건너다니던, 모래 가마니와 기둥감 두줄을 한데 묶은 외나무 겹다리를 보고, “장마철에는 저 다리가 떠내려갈텐데, 그러면 저 건너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통행하느냐?”고 박대통령이 묻자, 동석하였던 도지사(남봉진?이흥배?)가, “퇴촌과 남종(분원) 2개 면민 모두가 완전히 고립되어, 여러날 동안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다리 놓기를 반복하면서 건너다닙니다.”하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시골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은, “저런 ! 아주 시멘트로 좀 튼튼히 큰 다리를 하나 놓도록 해야지요 !, 그리고, 저 건너 초가집들은 매년 봄에 짚으로 영을 엮어서 지붕을 새로 해야 할텐데, 전국 농민들이 초가집 지붕을 한번 하면 좀 여러해씩 쓰도록 해봅시다!”. 하며 지시하였는데, 평소 좀 과묵한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에, 바로 퇴촌을 건너가는 첫 다리가 처음 착공되었고, 수행원들의 추진으로 상공부에서는 초가집 지붕 개량용 자재로 쓰레트 생산 개발에 착수하여, 처음 제작된 쓰레트로 전국에서 퇴촌면 광동리 마을이 제일 먼저 쓰레트 지붕개량 시범부락이 되었다고, 당시 관계인사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천진암 터가 있는 우산 2리 절막 마을은 당시 심산궁곡 종점이어서, 퇴촌 면사무소에서 천진암 터가 있는 우산리 절막까지 12 Km를 가려면 지그재그 식으로 흐르는 바위돌 무더기 우산천을 건너기 위해, 자주 신발을 벗어들고, 징검다리와 외나무 다리를 13번이나 건너야만 하는 산골이었다.
그런데 당시 동부면의 구산 성지 마을은 천수답이 많고 토질도 과히 좋지 않아 농민들 생활이 어려운 편이었으나, 비닐하우스의 상추 재배를 처음 시작하여, 겨울 농사로 큰 성과를 내자, 순교성인 김성우 안당 형제들의 7대 후손이 되는 젊은 김학성, 새마을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전국 최연소 면장(당시 31세?)으로 임용되어, 당시 광주군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던 퇴촌면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참여로, 면내의 새마을 사업, 특히, 관음리와 우산리에 이르는 산골 통행로 마차길과 징검다리의 간이교량들이 소폭으로나마 신규축조, 개선되었다.
그래도, 군이나 도의 예산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삼륜차나 대형 차량의 교차가 힘들어서, 중간 중간 한 편에서 기다려야 하는 곳들이 적지 않았다. 1975년 말, 필자가 수원교구청 사목국장 재직 시에 처음 천진암을 다녀갈 때만 해도, 퇴촌면 사무소의 건물 외벽은 송판으로 비늘처럼 붙이고, 빗물에 썩지 않게 검은 골탈(?) 칠을 하고, 지붕은 붉게 녹쓸은 함석 조각으로 되어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5.16 군사혁명 정부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과 마을로 가는 마찻길들은 좀 넓게 개선되었다. 1982년 천진암 성지의 절막마을 취락구조 개선으로 새로 지은 11동 건물이 퇴촌면 내의 최초 붉은 벽돌과 조선 개와(개량용 시멘트 제) 식으로 되어서, 면 내의 여러 마을에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60년 남상철 회장님과 정원진 신부님이 처음으로 앵자산의 천진암 터와 주어사 터, 번어사 터, 일출암 터, 봉태암 터, 석이암 터, 등을 찾아 답사하고, 1963년 1월 경향잡지에 게재하여 알렸었으나, 당시 관활교구(서울교구)에서는 전혀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고, 1963년 서울에서 분리 독립된 수원교구는 너무나 빈약하여, 22개 본당 중 대부분이 외국 교회의 미사예물 원조를 필요로 하였었고, 천진암 성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더욱이, 천진암 계곡과 퇴촌면 내에는 천주교회 토지가 단 한 평도 없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회 신자가 한명도 없었다. 몇 년 후, 훗날 북쪽 염티 고개 산맥너머 영동리의 석둔이 좁은 계곡에 양평 용문 산골에서 이사온 교우들 서너집이 배를 타고 일년에 한두번 양평성당으로 다니고 있음이 김학성 퇴촌면장한테 알려졌을 뿐이었다.
필자가 두 번째 교구청 근무를 마치고, 1976년 봄, 광주군 동부면 신장본당(신자 수 450여명, 일년예산 80여만원)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산골 농경지가 되어버린, 옛 천진암 터에 단 50평~100여평 만이라도 확보하여, 한조각 돌이라도 기념비를 세우고자, 주머니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돈도 없으면서, 신장 본당 대신학생들(차부제품 받은 김학렬, 동생 김학무, 형제)을 데리고, 천진암 터를 한두 차례 재답사하였으나, 산골 논 다랑이었던 천진암 터를 대대로 경작하던 근면하고 선량한 소유권자, 이창룡씨(새마을 지도자)는 매우 호의적이었고, 대토(代土)를 바라고 있었으며, 가난한 신장본당에 새로 부임한 필자는, 마음뿐이지, 그나마 무일푼으로서, 천진암 터 산골 논 50평이나 100평을 매입할 돈도 없었을뿐더러, 아주 간소하고 작은 기념비석 하나 세울 돈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기념사업을 하도록, 어느 수도회에라도 맡겨보려고, 이곳 저곳, 그래도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굴지의 수녀회, 등 7개 수도회 책임자들에게 부탁하여 보았으나, 함께 현지 답사를 하며 현장을 보고 나면, 처음 답사하며 겪은 도로 불편을 내세워, 번번히 진출입 도로가 없어서 불가능하다며, 모두들 천진암 성지기념사업을 맡지 않는다고,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울 某 저명인사가 전답 한평에 100원씩 주고 지금의 빙천담 터 주변 몇 백평을 매입하였을 정도로, 도무지 토지매매가 없던 산골이었다. 그 당시 퇴촌면 소재지는 도로 옆의 전답이 1천200원 내외로 어쩌다가 생기는 이농주민의 토지가 운이 좋아 매매되었었다. 면내의 인구도 불과 몇천명(1,500여명?)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울며 겨자먹기란 말처럼, 필자는 할 수 없이 우선 내 자신이 천진암 터에 땅이라도 몇 평 사놓고 돌 한조각이라도 세워보자는 심정으로, 우선 토사로 뒤덮힌 빙천 터 불모지 가시덩굴로 덮힌 경사지의 400여평 沓을 평당 2천원(?)씩에 매입하였다(1978.9.16.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일). 그러자, 마을 사람들 몇이 자기네 전답도 사 달라고, 밤중에 지금의 하남시 신장성당까지 몇 번이나 밤에 찾아왔으나, 필자는 무일푼으로 아주 난처하였었다. 산골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도시로 이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살레시오회 출신으로 수원교구에 입적한 벨지움 태생의 Raymond Spies(한국 姓 파신부)신부의 성금 지원으로, 천진암 터 15필지 계단식 논다랑이부터 강학당 터 750여평 田, 암자 터 150여평 沓, 주변 火田畓 터, 등 土砂로 뒤덮힌 불모지를 하나씩 둘씩 매입하였으나, 지게지고 오르는 바위돌 사이로 난 산비탈길 외에는 진입로가 없어서 불편이 극심하였다. 그 후, 1980년 봄, 필자가 한국주교회의의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준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는,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 최대의 국제적인 기념행사 준비로, 필자의 서울사무실 일이 너무나 폭주하여, 그 때부터 5년간 필자는 주일 오후에만 잠간씩 천진암을 방문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고,신장본당 업무도 첫보좌로 온 이용훈 신부(현재 수원교구장 주교)가 실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학생 때부터 책 번역하며 글 쓰던 버릇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와 발상지 천진암 터에 관하여 글을 써서, 교회 내 정기 간행물로 전국 성당에 알리기 시작하였고, 전국 각처에서 천진암 성지를 찾는 순례단들이 급증하였다. 특히 대구대교구의 박창수 신부를 비롯한 순례자들이 버스 3대~5대씩 이끌고 마차길을 따라 간신히 우산리까지는 들어왔으나, 회차를 못하여, 시골길에서 후진을 계속하느라, 새벽 4시경에서야 대구에 귀가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통행로가 불편하여, 대구 부산 등, 남부지방 관광운수업체들의 불만토로와 진정으로 경기도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81년 새로 부임한 염보현 경기도 지사의 관심과, 실로 고마운 협조로, 우선 번천리부터 천진암 성지 마을까지 시골길 15 Km 도로포장을, 종점 우산 2리 천진암 입구부터 착공하여, 우선 1.7Km를 마치게 되었는데, 특히, 평소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하고, 유능한 행정관으로서, 私心이 전혀 없는 염지사는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조성을 위하여, 성역 내의 국토이용관리법을 변경 고시(1982년), 하였으며, 성역 내의 각종 개척 사업 공사가 나능하게 정비하였으며, 마을 취락구조 개선 사업, 등, 성지 기반 시설 추진을 지원, 완수케 하였다. 그 후, 서울특별시장으로 전임하자, 서울 올림픽 준비도 완벽하게 수행하여, 한민족사에 기리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으로서, 주변의 낙후지역 도로개설과 서울올림픽 준비에 만전을 기한 점은, 그 어렵던 시절, 염보현 경기도지사 는 이 시대 우리나라 현대화에 있어, 당시 정부의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행정관이었다고, 필자는 확신하며 존경하고 있다.
그 후,1983년 초에 후임 김태호 지사가 계속하여 번천리까지 천진암로 도로의 포장공사를 연결, 마무리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983년 봄, 버스 2대로 서울 관훈클럽 외신 기자들의 천진암 성지 순례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1983년 11월 초 로마 교황의 한국 방문이 확정발표되었는데, 그 후에 일부 거리의 사람들은 단순한 짐작으로, 교황방한 덕으로 천진암로 도로 포장이 된 것처럼 말하지만, 당시의 날짜별 각 신문 보도와 천진암 가는 도로 확장 지적의 공부상 지목 변경 연월일을 보면, 사실상 천진암 성지 진입로 확장과 포장은 교황방문이 거론되기 훨씬 전에, 즉, 그보다 3년 전에 착수되었고, 완공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황 방한 결정 발표와는 무관하게, 훨씬 먼저 착수되고 완공되었음이 공부상으로도 확증되고 있다. 따라서 1984년부터는 외국인 순례자들의 방문 부쩍 늘어서, 프랑스인 주교 25명, 사제 78명을 모시고, 486명의 외국인들의 천진암 방문을 시작으로 우롭교회에 천진암 성지가 크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상하수도와 수세식 화장실,등이 없어서, 불편과 수치는 피할 수가 없었다.
김태호 지사의 뒤를 이어, 이해구 지사와, 특히, 김용래 지사는 천진암성지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성역 내의 하천정리와 각종 기반시설 토목공사 자문과 지원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심재흥 지사는 성역로 십자가에 이르는 경사면 토사방지의 난공사 진입 통로 조성과 힘든 포장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인제 지사의 청소년수련장 시설 완공, 특히, 경제적 혜안을 가진 후임 임창렬 지사의 천진암 성지 진입로 8 Km에 대한 4차선 확장 계획과 천진암의 실학박물관 건립 예산 확보는 당시 도의회의 승인(4차선 8km 450억, 실학박물관 건립 예산 150억, 합계 600억 예산이 도의회에서 승인. 당시 광주군의 일반 예산 2천4백억 내외)되어 4차선 도로확장 설계, 측량 착수) 하달 후에, 시행 과정에서, 지사의 인사이동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후임 김문수 지사의 박물관 수장고 건립 후원, 등, 장기적 안목을 지닌 유능하고 위대한 역대 경기도지사들의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조성에 기여한, 실로 지대한 공헌은 천진암 성지 자료집 기록과 당시 언론보도 등, 한국천주교회 역사에 기리기리 크나큰 공헌사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1975년부터, 필자가 천진암 터를 찾아 답사하던 시절은 물론,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퇴촌면 소재지에 음식점이 하나도 없어서, 군에서 누가 나오면, 면 직원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한다는 시절이었고, 필자역시 점심을 사먹을데가 아주 전혀 없기 때문에, 천진암 터를 재삼 재사 답사를 왔다 가는 날은 점심을 굶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신장까지 나가야 했었다.
그러나 천진암 성지에 전국 각처에서, 특히 해외에서도, 가장 많을 때는 1984년도 프랑스 신자들이 480명이 프랑스 주교 25명과 프랑스 사제 78명과 함께 천진암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수세식 화장실, 상수도등 불편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빈자로 위장하고, 약자로 위장한 일부 부동산 투자인들의 불법과 무법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반대와 방해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종종 토지를 사서 천주교회에 기증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최근에는 중국인 신도들이 단체로, 많을 때는 600여명씩 한꺼번에 수십명의 중국인 사제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와, 한민족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현장을 순례하러 오는데, 이들은 한민족의 장기계획에서 느끼는 바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더구나 천진암 성지 순례자들은 반드시 도시락을 가지고 오도록 미리 알려야 했었는데, 계속 증가하는 순례자들로 인하여, 특히, 매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일 행사에는 연평균 1만여명 내외의 신도들이 전국에서 모였고, 이런 큰 행사 때에는, 때로 5만여명(당시 경찰 추산)까지 운집하는 군중들을 위한 상수도와 하수도, 화장실이 없어, 아주 고전을 하였고, 길가에는 차차 간이 음식점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수백여개가 넘게, 음식을 아주 잘하는 요식업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천진암 성지가 지역 경제발전과 활성화에도 적지 않게, 지금도 크게 기여하며, 구심점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大韓民族100년계획 天眞菴大聖堂 건립 조감도<1979~2079>
-추후 계속- Msgr. Byon-
교황님 말씀; 평화는 상호 파괴의 협박 위에서 수립되지 않으니, 정의와 총체적인 인간 발전 위에서 확립되어야!.,,Holy Father,,,.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멧시지;
평화는 상호 파괴의 협박 위에 근거를 둘 수 없다.
평화는 정의와 총체적인 인간적 발전 위에 기초를 두어야만 합니다.,,,.
<핵무기 사용 금지에 관한 UN 회의에 보낸 교황님의 멧시지!>
La pace non può essere basata sulla "minaccia di distruzione reciproca",
ma deve fondarsi sulla "giustizia" e sullo "sviluppo umano integrale".
Pope sends message to UN conference on nuclear weapons
2017-03-28 Vatican Radio
(Vatican Radio) Pope Francis has sent a message to 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to Negotiate a Legally Binding Instrument to Prohibit Nuclear Weapons, Leading Towards their Total Elimination,” the first part of which is taking place in New York from 27-31 March. The message was read by Msgr Antoine Camilleri, Under-Secretary for Relations with States, and Head of the Delegation of the Holy See to the meeting.
Below, please find the full text of Pope Francis’ Message:
To Her Excellency Elayne Whyte Gómez President of 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to Negotiate a Legally Binding Instrument to Prohibit Nuclear Weapons, Leading Towards their Total Elimination
I extend cordial greetings to you, Madam President, and to all the representatives of the various nations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and of civil society participating in this Conference. I wish to encourage you to work with determination in order to promote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On 25 September 2015, before the General Assembly of the United Nations, I emphasized what the Preamble and first Article of the United Nations Charter indicate as the foundations of the international juridical framework: peace, the pacific solution of disputes and the development of friendly relations between nations. An ethics and a law based on the threat of mutual destruction – and possibly the destruction of all mankind – are contradictory to the very spirit of the United Nations. We must therefore commit ourselves to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by fully implementing the Non-Proliferation Treaty, both in letter and spirit (cf. Address to the General Assembly of the United Nations, 25 September 2015).
But why give ourselves this demanding and forward-looking goal in the present international context characterized by an unstable climate of conflict, which is both cause and indication of the difficulties encountered in advancing and strengthening the process of nuclear disarmament and nuclear non-proliferation?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e principal threats to peace and security with their many dimensions in this multipolar world of the twenty-first century as, for example, terrorism, asymmetrical conflicts, cybersecurity, environmental problems, poverty, not a few doubts arise regarding the inadequacy of nuclear deterrence as an effective response to such challenges. These concerns are even greater when we consider the catastrophic humanitarian and environmental consequences that would follow from any use of nuclear weapons, with devastating, indiscriminate and uncontainable effects, over time and space. Similar cause for concern arises when examining the waste of resources spent on nuclear issues for military purposes, which could instead be used for worthy priorities like the promotion of peace and integral human development, as well as the fight against poverty,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2030 Agenda for Sustainable Development.
We need also to ask ourselves how sustainable is a stability based on fear, when it actually increases fear and undermines relationships of trust between peoples.
International peace and stability cannot be based on a false sense of security, on the threat of mutual destruction or total annihilation, or on simply maintaining a balance of power. Peace must be built on justice, on integral human development, on respect for fundamental human rights, on the protection of creation, on the participation of all in public life, on trust between peoples, on the support of peaceful institutions, on access to education and health, on dialogue and solidarity. From this perspective, we need to go beyond nuclear deterrence: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s called upon to adopt forward-looking strategies to promote the goal of peace and stability and to avoid short-sighted approaches to the problems surrounding national and international security.
In this context, the ultimate goal of the total elimination of nuclear weapons becomes both a challenge and a moral and humanitarian imperative. A concrete approach should promote a reflection on an ethics of peace and multilateral and cooperative security that goes beyond the fear and isolationism that prevail in many debates today. Achieving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involves a long-term process, based on the awareness that “everything is connected” within the perspective of an integral ecology (cf. Laudato Si’, 117, 138). The common destiny of mankind demands the pragmatic strengthening of dialogue and the building and consolidating of mechanisms of trust and cooperation, capable of creating the conditions for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Growing interdependence and globalization mean that any response to the threat of nuclear weapons should be collective and concerted, based on mutual trust. This trust can be built only through dialogue that is truly directed to the common good and not to the protection of veiled or particular interests; such dialogue, as far as possible, should include all: nuclear states, countries which do not possess nuclear weapons, the military and private sectors, religious communities, civil societies,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And in this endeavour we must avoid those forms of mutual recrimination and polarization which hinder dialogue rather than encourage it. Humanity has the ability to work together in building up our common home; we have the freedom, intelligence and capacity to lead and direct technology, to place limits on our power, and to put all this at the service of another type of progress: one that is more human, social and integral (cf. ibid., 13, 78, 112; Message for the 22nd Meeting of the Conference of Parties to the United Nations Framework Agreement on Climate Change (COP22), 10 November 2016).
This Conference intends to negotiate a Treaty inspired by ethical and moral arguments. It is an exercise in hope and it is my wish that it may also constitute a decisive step along the road towards a world without nuclear weapons. Although this is a significantly complex and long-term goal, it is not beyond our reach.
Madam President, I sincerely wish that the efforts of this Conference may be fruitful and provide an effective contribution to advancing an ethic of peace and of multilateral and cooperative security, which humanity very much needs today. Upon all those gathered at this important meeting, and upon the citizens of the countries you represent, I invoke the blessings of the Almighty.
FRANCIS
From the Vatican, 23 March 2017
-Papa all’Onu: impegnarsi per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
2017-03-28 Radio Vaticana
La pace non può essere basata sulla "minaccia di distruzione reciproca", ma deve fondarsi sulla "giustizia" e sullo "sviluppo umano integrale". Occorrono "strategie lungimiranti" e la "piena applicazione del Trattato di non proliferazione nella lettera e nello spirito". E’ la riflessione centrale del Messaggio che il Papa ha inviato alla Conferenza dell’Onu riunita fino a venerdì a New York, con lo scopo di negoziare uno strumento legalmente vincolante che porti ad eliminare totalmente le armi nucleari. Il servizio di Gabriella Ceraso:
“Un’etica e un diritto basati sulla minaccia della distruzione reciproca – e potenzialmente di tutta l’umanità – sono contraddittori con lo spirito stesso delle Nazioni Unite”. Il Papa lo sottolinea nel suo messaggio citando il Preambolo e il primo articolo della carta dell’Onu che indicano le “fondamenta della costruzione giuridica internazionale” ovvero “la pace, la soluzione pacifica delle controversie e lo sviluppo delle relazioni amichevoli tra le nazioni”.
Lavoriamo per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applichiamo i Trattati Da qui l’incoraggiamento a chi a New York sta lavorando in questi giorni: impegnarsi per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applicando pienamente il Trattato di non proliferazione”, come disse lo stesso Papa all’Assemblea Generale della Nazioni Uniti il 25 settembre di due anni fa.
Ma “perché porsi questo impegnativo e lungimirante obiettivo nell’attuale scenario internazionale” in cui prevale un clima di “conflittualità”, che è sia “causa che indicazione delle difficoltà che si riscontrano nel promuovere e rafforzare il processo di disarmo e di non proliferazione nucleari?”
Armamenti incapaci di rispondere alle sfide di oggi e pericolosi Nel mondo “multipolare del XXI secolo”, fa notare il Papa, la deterrenza nucleare risulta non solo “inadeguata” a rispondere con efficacia alla principali minacce alla pace e alla sicurezza con le loro molteplici dimensioni “– il terrorismo, i conflitti asimmetrici, la sicurezza informatica, la povertà - ma ha anche “conseguenze umanitarie e ambientali catastrofiche”, “indiscriminate” e “incontrollabili”.
Il Papa esprime inoltre la preoccupazione per lo spreco di risorse per il nucleare a scopo militare che potrebbero essere utilizzate per “priorità più significative”, tra cui anche l’attuazione dell’Agenda 2030 per lo sviluppo sostenibile. Ma c’è anche da chiedersi “quanto sia sostenibile un equilibrio basato sulla paura”. Da qui il cuore della riflessione del Pontefice.
Il fondamento della pace non è la paura nè la falsa sicurezza, ma la giustizia “Pace” e “stabilità” non possono essere fondate su un falso senso di sicurezza, sulla minaccia di una distruzione reciproca o di totale annientamento. La pace, sottolinea il Papa, “deve essere costruita sulla giustizia, sullo sviluppo umano integrale, sul rispetto dei diritti umani fondamentali, sulla custodia del creato, sulla partecipazione di tutti alla vita pubblica, sulla fiducia fra i popoli, sulla promozione di istituzioni pacifiche, sull’accesso all’educazione e alla salute, sul dialogo e sulla solidarietà”.
Servono strategie lungimiranti, dialogo condiviso, non isolazionismo E’ per questo che “abbiamo bisogno di andare oltre la deterrenza nucleare”. Il Papa chiede alla comunità internazionale dunque l’adozione di “strategie lungimiranti” e il rifiuto di “approcci miopi” ai problemi di sicurezza nazionale e internazionale. Ma per il Pontefice la "sfida" e "l’imperativo morale e umanitario" di eliminare totalmente le armi nucleari, hanno bisogno anche di “una riflessione su un’etica della pace e della sicurezza cooperativa multilaterale che vada al di là della paura e dell’isolazionismo” prevalenti. Il “destino condiviso dell’umanità” richiede, afferma il Papa, di “rafforzare, con realismo il dialogo e costruire e consolidare meccanismi di fiducia e di cooperazione, capaci di creare le condizioni per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non è fuori della nostra portata Fiducia reciproca dunque, dialogo orientato al bene comune e “non verso la tutela di interessi velati o particolari” è quanto ribadisce Francesco, un “dialogo inclusivo” tra Stati, società civile, Organizzazioni e comunità religiose, che sia privo di “polarizzazioni “ e di “recriminazioni”. L’umanità, scrive il Papa, ha la “capacità di lavorare insieme, la capacità di guidare e dirigere la tecnologia", così come di "limitare il nostro potere", e di "metterli al servizio di un altro tipo di progresso: più umano, più sociale e più integrale”.
Un mondo senza armi nucleari, conclude Francesco rivolto ancora ai partecipanti alla Conferenza dell’Onu su cui invoca la Benedizione dell’Onnipotente, è un “obiettivo di lungo periodo estremamente complesso”, ma “non è al di fuori della nostra portata”. (Da Radio Vaticana)
입력 : 2017.03.29 오전 2:52:33
Copyright ⓒ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Servant Hall of Msgr.Byo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