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진리와 진실도 다수결로 결정하려고 하나 ?! 변기영 webmaster@kyeonggi.com ,노출승인 2017년 10월 17일 21:02 발행일 2017년 10월 18일 수요일,경기일보 제22면에서 <퍼온 글>
[삶과 종교]
진리와 진실도 다수결로 결정하려고 하나 ?!
진리와 진실이 없으면 정의가 있을 수 없으며, 정의도 자유가 없는 곳에는 있을 수가 없으니 진리도, 진실도, 자유가 없는 곳에는 있을 수가 없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1+1=2)는 수학적인 진리는 전세계 수학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도 새로운 수학인들이 다시 모여서 다수결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 전 인류가 배우고 깨달아 따르며 활용해야만 하는, 영구불변의 진리다. 결국 모든 진리는 인간들이 발견하고 깨닫고 활용하며 따라야 하는 것일 뿐, 새로이 창조하고 변경하거나 꾸미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7년 다음에는 2018년이 온다는 시간적 진리 역시, 전세계 모든 시계 제작인들과 우주 천체 물리학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새로이 또 다수결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리학이나 물리학이나 천문학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물리학적인 이성과 정신세계의 형이상학, 즉 철학, 윤리학, 정치학, 법률학, 신학, 등의 종교적 영역에서도, 자유를 존재가능조건으로 삼는 진리와 정의는 다수결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영구불변적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민주주의 다수결 만능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정치계에 있어 다수결 원칙은 성경이나 불경이나 유교의 사서삼경 이상으로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존중하고 앞에 내세우며 천하의 진리인 듯, 다수결 원칙을 ‘최고의 天命(천명)’처럼, 때로는 다수결을 만들어가며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결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너무나 잘 모르고 있으니, 다수인들의 자유롭고 바른 양심과 건전한 상식 수준이 함량미달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 즉 ‘다수결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고 확인하지 않으며, 무시하고 또 소홀히 여기고 있다. 마치 언론 보도의 자유와 권리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정직하고 공정하게, 공익을 위하여 보도해야만 하는 의무와 책임이 절대적인 전제 조건으로 있음과 같다.
그래서 비일비재한 소수의 폭력이나, 독재자 1인의 비민주적 폭력도 매우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민주적이라고 내세우는 다수결 주창자들 다수의 폭력은 소수의 폭력이나 1인 독재자의 폭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최근 우리는 다수의 폭력이 소수의 폭력보다 비할 수 없이 더 끔찍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이른바 ‘문화혁명’을 통하여 모를 수가 없게 되었고, 특히 지난 세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7년을 전후한 북유럽 각국에서도 그 비극을 세계 인류가 너무나 뼈저리게 직시하여 왔다.
그러므로 정의와 진리의 절대조건이 되는, 자유가 없는 사람들의 말과 글과 행동에는 진리와 진실이 있기 어렵고, 특히 정의가 살아있을 수 없으니, 정의가 없는 권력이나 권한 행사는 폭력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교황 베네딕도 16세 교서).
지금 우리는 이번에도 ‘휴전선의 이동으로 끝나게 되기 쉬운, 새로운 전쟁'의 전주곡이 요란하게 매일같이 울려 퍼지는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남북한만의 전쟁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중공만의 전쟁도 아니며, 더욱이 가공할 핵무기 사용의 제3차 세계대전의 출발과 동시에 종결이 될 수도 있다는, 인류 자멸의 비참한 대재앙급 천하대란의 전쟁이 임박한 듯, 많은 국민들이 참으로 불안해하며 착잡한 예감을 누를 수가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전쟁은 인류의 고귀한 자유와 정의와 진리와 진실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리는 비인간화 민족 집단들의 다수결을 빙자한 소수와 1인 독재자들의 오만한 폭력행위다. 따라서 비양심과 몰상식의 극소수 인간들이 외치는 원앙 소리만을 따라가도록, 광란의 집단들이 부르짖는 함성으로, 인류자멸의 대흉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자유를 위한 순교자들이 되고, 정의를 위한 용사들이 되어, 진리와 진실을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 나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야 하겠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5천여만 명의 주민들은 많이 살고 있으나, 국민들은 너무나 적지 않은가? - 변기영 천주교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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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정의와 분리될 수 없다. 교황 베네딕도 16세 말씀 -Msgr. Byon- 2012-02-10 / 조회 1655
어제 교황님 말씀,[권리는 정의와 분리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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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의 권력 행사는 正義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正義가 없는 權力 행사 ? 정의를 떠난 권력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 로마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말씀-
(IL VERO DIRITTO E‘ INSEPARABILE DALLA GIUSTIZIA)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어제(1월 23일), 로마 교황청 법관들의 새해 법정(法庭) 개정(開廷)기념 알현자리에서(.i membri del Tribunale della Rota Romana, in occasione dell'apertura dell'Anno Giudiziario), 사법권자들이 행사하는 권력이나 權限(diritto) 행사는 正義(giustizia)와 분리(分離)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좀 알기 쉽게 풀어서 달리 말해 본다면, 우리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교회 안에서 우리의 지위와 자격에 주어진 권한 행사가 正義에 어긋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재판관들에게 아무리 판결권이 있어도,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는 판결이나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는 것입니다. 권력에 의한 권한행사는 正義와 不可分의 것이고, 정의와 分離不可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판결이나 결정은 正義가 아닌 不義입니다. 아무리 유식한 판관이라도 거짓을 말할 권한이 없으며, 다른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허위나 조작된 바를 근거로 하여, 어떠한 결정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正義와 동떨어진 판결이나 결정의 권한 행사는 행정폭력이오, 사법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正義는 모든 판결과 사회적 결정의 이유와 기준이며, 근거와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正義를 떠나서 결정된 판결은 정치적 偏愛고, 특정 조직체나 개인을 위한 선동과 선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의는 권력이나 권한과 자유의 기초요, 근거이며, 이유와 목적이 되며, 기준과 존재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없는 권리나 권한이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폭력이며, 폭행이 될 뿐입니다.
Msgr. Byon
[참다운 權限 행사는 正義와 分離될 수 없는 것입니다]
(IL VERO DIRITTO E‘ INSEPARABILE DALLA GIUSTIZIA)
-교황 베네딕도 16세, 20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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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23. 01. 2012 - Anno XXII - Num. 16
IL VERO DIRITTO E' INSEPARABILE DALLA GIUSTIZIA.
CITT? DEL VATICANO, 21 GEN 2012 (VIS). Il Santo Padre ha ricevuto questo sabato, nella Sala Clementina, i membri del Tribunale della Rota Romana, in occasione dell'apertura dell'Anno Giudiziario.
? Il discorso di Benedetto XVI ? stato incentrato su un aspetto primario del ministero giudiziale: l'interpretazione della legge canonica in vista della sua applicazione. Il Papa ha ricordato che l'ermeneutica del diritto canonico "? strettamente legata alla concezione stessa della legge della Chiesa", e ha rifiutato due modi di interpretare la legge che ne determinano l'impoverimento. Il primo tende a "identificare il diritto canonico con il sistema delle leggi canoniche", con il conseguente "oblio pratico del diritto naturale e del diritto divino positivo, come pure del rapporto vitale di ogni diritto con la comunione e la missione della Chiesa". Nel secondo, "la singola situazione diventerebbe fattore decisivo per accertare l'autentico significato del precetto legale nel caso concreto".? Ma in questo modo "l'opera interpretativa umana assurge a protagonista nello stabilire ci? che ? giuridico. Manca il senso di un diritto oggettivo".
? In alternativa a queste vie inadeguate, il Papa ha fatto notare che, nella via ermeneutica corretta, "la comprensione adeguata della legge canonica apre la strada a un lavoro interpretativo che s'inserisce nella ricerca della verit? sul diritto e sulla giustizia nella Chiesa. (...) Il vero diritto ? inseparabile dalla giustizia. Il principio vale ovviamente anche per la legge canonica, nel senso che essa non pu? essere rinchiusa in un sistema normativo meramente umano, ma deve essere collegata a un ordine giusto della Chiesa, in cui vige una legge superiore. In quest'ottica la legge positiva umana perde il primato (...) giacch? il diritto non si identifica pi? semplicemente con essa; tuttavia, la legge umana viene valorizzata in quanto espressione di giustizia, anzitutto per quanto essa dichiara come diritto divino, ma anche per quello che essa introduce come legittima determinazione di diritto umano".
? "In tal modo, si rende possibile un'ermeneutica legale che sia autenticamente giuridica, nel senso che, mettendosi in sintonia con il significato proprio della legge, si pu? porre la domanda cruciale su quel che ? giusto in ciascun caso. (...) Le regole umane vanno interpretate anche alla luce della realt? regolata, la quale contiene sempre un nucleo di diritto naturale e divino positivo, con il quale deve essere in armonia ogni norma per essere razionale e veramente giuridica".
? In questa prospettiva, che il Papa ha definito "realista", il lavoro interpretativo acquista un senso e un obbiettivo, dal momento che "? vivificato da un autentico contatto con la realt? complessiva della Chiesa, che consente di penetrare nel vero senso della lettera della legge. (...) Ne segue che l'interpretazione della legge canonica deve avvenire nella Chiesa. (...) Il 'sentire cum Ecclesia' ha senso anche nella disciplina, a motivo dei fondamenti dottrinali che sono sempre presenti e operanti nelle norme legali della Chiesa. In questo modo, va applicata anche alla legge canonica quell'ermeneutica del rinnovamento nella continuit? di cui ho parlato in riferimento al Concilio Vaticano II, cos? strettamente legato all'attuale legislazione canonica".
? "Questi atteggiamenti di fondo", ha sottolineato il Pontefice, "si applicano a tutte le categorie di interpretazione: dalla ricerca scientifica sul diritto canonico, (...) fino alla ricerca quotidiana delle soluzioni giuste nella vita dei fedeli e delle comunit?. Occorre spirito di docilit? per accogliere le leggi, cercando di studiare (...) la tradizione giuridica della Chiesa per potersi identificare con essa e anche con le disposizioni legali emanate dai Pastori, specialmente le leggi pontificie nonch? il magistero su questioni canoniche, il quale ? di per s? vincolante in ci? che insegna sul diritto".
? "Queste riflessioni acquistano una peculiare rilevanza nell'ambito delle leggi riguardanti l'atto costitutivo del matrimonio e la sua consumazione e la ricezione dell'Ordine sacro, e di quelle attinenti ai rispettivi processi. (...) In particolare, vanno anche applicati tutti i mezzi giuridicamente vincolanti che tendono ad assicurare quell'unit? nell'interpretazione e nell'applicazione delle leggi che ? richiesta dalla giustizia: il magistero pontificio specificamente concernente questo campo, contenuto soprattutto nelle Allocuzioni alla Rota Romana; (...) le norme e le dichiarazioni emanate da altri Dicasteri della Curia Romana".
? "Tale unit? ermeneutica in ci? che ? essenziale, ha evidenziato il Santo Padre, non mortifica in alcun modo le funzioni dei tribunali locali, chiamati a confrontarsi per primi con le complesse situazioni reali che si danno in ogni contesto culturale. Ciascuno di essi, infatti, ? tenuto a procedere con un senso di vera riverenza nei riguardi della verit? sul diritto, cercando di praticare esemplarmente, nell'applicazione degli istituti giudiziali e amministrativi, la comunione nella disciplina, quale aspetto essenziale dell'unit? della Chiesa".
? Benedetto XVI, infine, ha parlato dell'innovazione relativa al trasferimento a un Ufficio della Rota le competenze circa i procedimenti di dispensa dal matrimonio rato e non consumato e le cause di nullit? della sacra Ordinanza: "Sono certo che vi sar? una generosa risposta a questo nuovo impegno ecclesiale".
입력 : 2012.02.10 오후 10:02:10 / www.변기영몬시뇰사랑방.kr, ⇨
言論이 正直해야 社會가 바로 나갈 텐데! 1960년 봄, 3.15.부정선거 당시 우리 언론을 되돌아보자 ! 당시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사설과 보도의 정론직필이 어떠했는지 ?! Msgr. Byon Date : 2011-08-16 10:26 조회. 1705
言論이 正直해야 社會가 올바로 나갈 텐데, 일부 언론이 정직하지 못한 이유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 언론사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지 못한 언론인이 있는 그 언론기관은 惡論의 조직체가 될 뿐이다. 채송화가 왜 백일홍이 아니냐고 우겨대는 말도 特筆大書하는 것은 실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현상이다. 有識하고 有能한 직원보다 正直하고 善良하고 勤勉한 사람들을 써야 한다.
더구나 部分을 全部와 同一視하여 선동하는 것은 事理判斷力을 상실하였거나, 意圖的인 故意와 惡意로서, 대단히 不正直한 反言論的이며, 매우 非言論的인 행위다. 얼굴에 검은 점이 하나 있으면 점박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흑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 절도범 1명을 잡았다고하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절도범죄자들처럼 선전하는 것은 언론폭력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을 무대로 삼아 정신적이며 지성적인 言論暴力을 자행하는 언론기관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러한 폭력언론에 침묵하며 묵인하는 것은 언론 폭력에 同助하는 행위이며 共犯者들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담당 기관들이 暴力 言論人들의 言論 暴力을 袖手傍觀하며, 이를 용납하는 것도 국민들에 대한 공개적인 言論 暴力 후원이 아닐 수 없다.
非合理的이고 非論理的이며 反理性的이고 非良心的며 不合理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나, 보도하는 기관이나, 추종하며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 신분이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신앙인이든, 교육자든, 법조인이든, 예술인이든, 공무원이든, 종교인이든, 누구든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사회의 破壞者들이다. 正常的인 인간들의 言語도 아니고, 論理나 論說도 아니다.
분명히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縱橫無盡으로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언론폭력을 茶飯事로 삼고 있는 言論暴徒들은 武裝暴徒들 못지 않게, 善良하고 正直한 국민들, 특히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을 비참하게 망치고 있다. 위대한 나라, 大韓民國의 國旗를 내리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청소년들을 위하여 교육적으로 言論暴徒들은 國防 차원에서도 反國家 事犯으로, 公安事犯으로 조치해야만 하지 않을까!?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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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Msgr. Byon Date : 2011-08-16 10:26 조회.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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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權을 守護하기 위하여는,
國憲 遵守가 政治人들에게 주어진 唯一한 길이다 !
言論暴力과 言語暴力,暴力政治와 暴力社會 ! 언론폭력과 언어폭력, 폭력사회와 신앙인의 순교는 ?!
언론의 자유와 권리에는 진실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공익을 위하여 보도할 의무와 직분이 전제된 것인데, 허위를 꾸미고, 보태고, 덧붙이고, 늘이고, 침소봉대하고, 도색하며,진실은 하나뿐인데, 깎고, 가리고, 줄이고, 변질시키고, 변형시켜 전하는 것은 보도의 자유와 권리가 아닌데 !
이미 저런 사람들이 풀어헤치고 쏟아놓은 보따리를 보면,
앞으로,무슨 말인들 못하며,무슨 짓인들 아니하랴!!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면, 고맙다는 인사대신, 오히려 주머니 속에 숨기고 다니던 칼을 빼어 들이대며,
"자네 보따리도 내게 주고 어서 가게!"한다더니 !!
참으로 背信의 시대요, 背恩의 집단들이 忘德의 춤을 추는 저녁이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 잘 살게 한, 위대한 국가 조직체를 弱化시키거나, 無力化시키고, 瓦解시키고, 破壞시켜서, 이름만 남게 한 대한민국의 國體를 교체하려는, 현 대한민국을 송두리채 뜯어고쳐야 한다는 國家 滅亡을 전제한 혁명적 논리의 고성과 함성을 들을 때마다 기가 막힌다.
흔히 사람들이 가장 하기 쉬운 말이 남을 흉보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이고,
가장 쉽게 믿고, 가장 즐겨하며 빨리 전하는 말이 남에 대한 짐작으로 보태고 붙여서 하는 말이다.
남들이 못나고, 틀리고, 나쁘다 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남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聖 Francesco Salesio 주교님은 가르쳤다.
"항상 남들에 관하여는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고, 좋게 대하여 주어라!"
또한, St. Augustinus 주교님도 좌충우돌하며 방황하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바쁘게 뛰기는 잘 뛰는데, 길 밖으로 달리고 있구나 !
(Bene currit, sed extra viam !")
善과 平和 (bonum et pax), 眞과 義 (verum et justum)가 滅種되지 말아야 할텐데!
착함과 평화는 母女 관계고, 참됨과 옳음은 父子관계다.
有能하고, 有識하고, 有力한 사람들보다도, 善良하고 仁慈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다.
착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 가난과 멸시도 좀더 쉽게, 가볍게, 즐겁게 이겨나갈 수 있다.
진솔하고 옳바른 사람들이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며, 사람 사는 사회로 만들어 간다.
이제는 국론분열의 심화를 우려하며,예방하기 위하여, 언론과 종교계가 앞장서서 정부를 도와야 합니다. 結者解之다. 오늘의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하여, 종교계와 언론계의 책임과 사명을 되새기자!
善과 平和 (bonum et pax), 眞과 正義 (verum et justum)가 滅種되지 말아야 할텐데! 착함과 평화는 母女 관계고, 참됨과 옳음은 父子관계다. 有能하고, 有識하고, 有力한 사람들보다도, 善良하고 仁慈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다. 착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 가난과 멸시도 좀더 쉽게, 가볍게, 즐겁게 이겨나갈 수 있다. 眞率하고 옳바른 사람들이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며, 사람 사는 사회로 만들어 간다.
이제는 국론분열의 심화를 중단, 회귀, 치료, 회생시키고, 예방하기 위하여, 언론과 종교계가 보다 진솔한 자세로, 애국심으로 앞장서서 정부를 도와야 할 것이다. 모기 한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큰 칼을 뽑아들고, 천군만마를 동원하여 총 공격을 하며, 산천을 진동시키고 나니, 겨우 생쥐 한마리 튀어나오는 격이 아닐까?! 구부러진 쇠뿔을 펴서 곧게 만들겠다고, 무쇠망치로 소의 뿔을 계속 두들겨 패다가는 소를 죽게 할까(矯角殺牛) 걱정이다.
논리적인 말(言論)로 공익을 위하여 질서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보도와는 전혀 다른, 억장(臆腸)이 끊어지고 무너지는 듯한 [억지]로서, 필요이상의 집중보도와 연속보도와 과장보도와 편중보도, 등 반복보도 일변도로 될 때, 이는 언론이 아니고, 선전요원들의 억론(臆論)이고, 선동가들의 惡論이 되지 않을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 옛날 시외 버스가 정류소에 정차할 때마다, 승객들의 하차보다도 먼저 올라와서, 물건을 강매하려는 상인들의 억지 선전과 무엇이 다르랴?!
國民大衆의 愚民化 선동 정책을 전용물로 삼던, Trotchki와 Stalin, Lenin, 등이 여타의 내용 보도를 차단하고 써먹던, 무신론 사회주의 혁명인들의 과거 1917년을 전후한 방법론의 모방이나 답습이 아닌가도 모든이가 스스로 점검해 나가야 할것이다. "군중은 아둔하니, 거짓말로라도 우선 속여라! 속을 것이다 ! 허위조작이 들어나더라도, 제2, 제3, 제4의 새로운, 다른 허위로 연결하며, 또 속여라 ! 또, 속는다. 계속 속여 나가거라 ! 계속 속아 넘어가게 될 것이다 ! " 사회주의 혁명 과업을 위한 투쟁의 과정을 파헤치던, 어느 영국인 識者의 이야기가 회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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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의 날에, 무혈의 순교자 성모님의 일생을 되새기며,,,.
언론폭력과 언어폭력,
폭력 정치와 정치폭력,
폭력사회와 신앙인의 순교는!
狂亂의 시대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폭력언어를 되새겨 본다.
언론 폭력과 언어폭력 ! / 폭력 언어와 폭력 언론! / 사법 폭력과 폭력 법치 ! / 폭력 정치와 정치 폭력! / 행정 폭력과 폭력 행정! / 종교 폭력과 폭력 신앙! / 폭력 사회와 사회 폭력! / 개인 독재와 다수의 폭력 ! / 다수의 폭력과 폭도 사회! / 사회 폭력과 사회 정의 ! / 정의사회와 폭력의 광란 ! / 폭력과 순교 !무혈의 순교와 성모님의 일생 !
사회 각 분야에 無理한 非理와 不合理한 억지의 暴力이 亂舞하는
狂亂의 時局에,言論暴力과 言語暴力이 王하고 있는 느낌이다.
良心과 常識, 愛國心이 있는 正直한 言論人들이
나라를 지키고,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暴力 政治와 政治 暴力! / 行政 暴力과 暴力 行政! / 言語 暴力과 言論 暴力! / 暴力 言語와 暴力 言論! / 司法暴力과 暴力 法治! / 宗敎暴力과 暴力 信仰! / 暴力社會와 社會暴力! / 個人獨裁와 多數의 暴力 ! / 多數의 暴力과 暴徒 社會! / 社會暴力과 社會 正義 ! / 正義社會와 社會正義 ! / 民衆暴力과 暴力革命 ! / 含血吩人, 先汚其口 ! / 勸上搖木, 矯角殺牛 ! /
善과 平和 (bonum et pax), 眞과 正義 (verum et justum)가 滅種되지 말아야 할텐데!
착함과 평화는 母女 관계고, 참됨과 옳음은 父子관계다.
有能하고, 有識하고, 有力한 사람들보다도, 善良하고 眞率하며, 仁慈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아갈 수 있도록 힘껏 애쓰며 일하는,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반면에 참으로 나쁜 국민들도 적지 않다.
도무지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할 수 있다.
(語不成說,言語道斷,牛耳讀經,馬耳東風, 燆角殺牛, 勸上搖木,
含血吩人, 先汚其口, 非禮非言, 非禮非聞, 莫看他非,),
마음이 통해야 말이 통하고, 말이 통해야,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그래야, 한 마음 한뜻으로 단합하여, 통일까지도 이룩할 수 있지 않으랴?
언론의 자유와 권리에는 진실을 정직하게 공익을 위하여 보도할 의무와 직분이 전제된 것인데, 허위를 꾸미고, 보태고, 덧붙이고, 늘이고, 침소봉대하고, 도색하며, 아주 공개적으로까지,,,,!진실은 하나뿐인데, 깎고, 가리고, 줄이고, 달리 만들어, 전하는 것은 보도의 자유와 권리가 아니고, 보도폭력이다 !
사람들이 가장 하기 쉬운 말이 남을 흉보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이고, 가장 쉽게 믿고, 가장 즐겨하는 말이 남들이 못나고, 틀리고,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남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聖 Francesco Salesio는 가르쳤다.
"항상 남들에 관하여는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고, 좋게 대하여 주어라!"
착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 가난과 멸시도 좀더 쉽게, 가볍게, 즐겁게 이겨나갈 수 있다.
진솔하고 옳바른 사람들이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며, 사람 사는 사회로 만들어 간다.
언론이 정직하면, 사회가 정직해진다. 국가와 사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힘은
종교인들보다도 언론인들에게 주어진 특은이며,가장 큰 사명이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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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血의 殉敎와 聖母님의 一生 !
善과 平和 (bonum et pax), 眞과 義 (verum et justum)가 滅種되지 말아야 할텐데!
착함과 평화는 母女 관계고, 참됨과 옳음은 父子관계다. 有能하고, 有識하고, 有力한 사람들보다도, 善良하고 仁慈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다. 착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 가난과 멸시도 좀더 쉽게, 가볍게, 즐겁게 이겨나갈 수 있다. 진솔하고 옳바른 사람들이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며, 사람 사는 사회로 만들어 간다.
Msgr. Byon- 입력 : 2016.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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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Msgr. Byon Date : 2011-08-16 10:26 조회. 1705 |
입력 : 2017.10.17 오후 9: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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