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2018년 4월 4일 자, [삶과 종교]- <본 원고 이해를 위한 추가 해설 > >
武器非核化와 平和統一 위한 세계적 聖地 Portugal의 Fatima, !
Denuclearizartion, peacefull reunification of Korea, and, Fatima of Portugal!
최근 우리는 ‘남북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매우 자주 즐겨 쓰고 있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통일을 위해서라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정신이 대부분 지배적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더욱이 정치적으로, ‘평화’를 위해서는 武力과 재력이 우선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침략군들을 막는 國家安保나, 강도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개인들의 身邊安全으로 느끼는 ‘安全’이란 말과, 최근 우리가 흔히 쉽게 즐겨 쓰는 ‘平和’ 라는 말의 뜻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남북한이 자신들에게 없는 평화를 상대방에게 줄 수는 없다. 우선 양쪽 모두가 자기들끼리나 먼저 칼을 버리고, 오손도손 평화롭게 살고 있는 평화로운 동족 국가들이라야만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을 갈면서 이를 악물고 무력을 강화하면서, ‘平和’를 외치던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와 독일 히틀러 정권의 고함소리들은 모두가 거짓이었음을 현대 인류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타국 점령이나 공격의 핑게가 흔히,'인민해방' 아니면, '상호 평화'였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평화의 뿌리와 기초는 善이다. 평화는 선에서 오는 것이지, 악에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평화는 선인들의 창조물이다. 善한 사람은 자신도 평화롭고, 남도 평화롭게 되도록, 평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惡한 사람은 아무리 돈이나 칼이나 화살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잠시 안심할 수는 있어도, 자신도 평화로울 수 없으며,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평화를 남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善은 平和의 어머니며, 平和는 善의 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평화는 칼과 돈에서 탄생되지 않고, 善에서 태어나게 마련이다. 참된 平和는 善을 基礎와 源泉으로 삼아, 自由와 正義와 眞實의 터전에서 태어나 사랑을 먹고 마시며 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한마디로, 집 터 없는 집이 세워질 수 없다는 佛家의 名言이나, 또는 어머니 없는 딸이 태어날 수 없다는 뜻의, 儒家의 正言처럼, 善이 없이는 戰爭이 날 수는 있어도, 平和가 생존할 수는 없다.
善한 사람과 함께 말하며 일하면서, 우리는 평화를 느끼고 배운다. 그러나 善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살면 한 집안에서도 不和와 불란이 그칠 날이 없다. 사회 단체나 국가 간에도 善한 사람들이 없으면 논쟁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다. 善하지 못한 사람들과 善이 없는 국가와 사회에는, 아무리 돈과 칼이 많고, 또 더욱 많이 주어도, 그들과의 평화는 존재할 수가 없다. 군국주의 강대국 일본과,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던 히틀러의 독일에 평화가 있었는가 ? !
일본은 조선을 점령하고 북만주와 중국 남경까지 대만과 필립핀과 싱가폴까지, 미국의 화와이 진주만 공격까지, 끝없는 전쟁에 전쟁을 거듭하면서, 평화 대신 무서운 대량 인명 살상과 파괴를 그치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 역시, 인민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얼마나 많은 전란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가!? 공산주의 사회에는 평화도, 안전도 없다.
오늘의 우리 종교인들은 설교와 기도 중에,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외치는 노력 그 이상으로, 남북 양쪽 사회와 국민 개개인들이 먼저 선한 사람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자신들이 아직은 善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대방의 善을 받아들일 수 있는 善業의 受容性조차 전무하다면, 어떻게 평화통일이 가능하랴 ?
수 천 만명의 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죽이고 죽어 가던 세계 제2차 대전 말, 1945년 끝까지 2차대전에 參戰하지 않고, 自國의 軍人 1 名도 2차대전 어떤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는 Portugal 뿐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폴투갈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와 인도와, 특히, 마카오 점령에서 보듯이, 극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양 군사 대국으로서, 무수한 전쟁을 감행하며, 위세를 떨치던, 싸움꾼의 정복자 나라였다.먼 나라 정복을 위하여 큰 바다까지 건너가서 전쟁을 다반사로 여기던 해양 군사 강국이었다.
그러나, 1917년, 폴투갈의 최하위 빈민 지역 Fatima 시골에 가난한 농부들의 자녀로 태어나서, 양 떼를 따라다니며 자라던 10세 미만의 6세, 8세, 10세,시골 어린이들 3명에게, 천상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6개월 동안 매월 한차례씩 발현하여, 10월 중 마지막 발현 때는 미리 소문을 듣고, 이웃 나라들과 전 세계에서 걸어서 모인 7만 5 천 여명의 풀밭에 모인 군중들에게, “인류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또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폴투갈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이 초자연적 천상 인물의 발현과 애절한 부탁은 로마 교황청과 전 세계, 특히, 유롭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당시 폴투갈 국민들은 성모 마리아의 말씀대로, 1917년 1차 세계 대전이 속히 끝나도록, 또 우선 자기네들 모두가 회개하여 善良한 국민들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또,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따라서, 폴투갈은 전쟁을 거부하는 2차대전 불참 국가로 살기를 거듭 재다짐하였다. 그 결과, 성모 마리아께서 듬으로 주시는 특은과 전국민의 회개와 기도로, 폴투갈은 세계에서 자기네 나라 안에서는 끔찍한 강력범죄까지도 없는 유명한 나라로도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인공적인 낙태도 허락되지 않아, 극소수의 불가피한 여성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이웃나라를 다녀 와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현재, 파티마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6백 여만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와, 세계 평화와, 특히, 로마 교황 성하의 간청과 뜻을 따라, 한반도의 무기 비핵화와, 특히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지로서, 현재, 파티마 성지는, 유롭에서 최빈국 수준에 있던 폴투갈에 매년 30억불 이상의 순수 관광 수입원이 되어, 폴투갈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매우 가난하던 파티마 빈민촌 지방은 성지로 개발되면서 지금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는데, 관광수입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일반 수출 무역의 경우, 원자재 값이나, 운임비, 가공비, 포장비와 천문학적인 선전비, 엄청난 광고비, 운반비, 단계별 인건비, 수출과 수입에 따른 세금, 등을 감안하면, 자동차나 TV나 컴퓨터 생산과 수출의 경우에도, 원가 비용을 제하고 나면, 순수 수익은 얼마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읽고, 들은 적이 있는데, 농산물만 하더라도, 가을에 추수하여 계산을 해 보면, 농사 짓는데 들어가는 비용 중에, 이른 바, 장 3형제(간장, 고추장, 된장) 값이 모자란다는 말이 우리 시골 농부들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관광수입은 자국에서 생산하는 식료품 원료로 음식도 만들고, 기념품, 숙박, 교통, 문화 선전, 등 거의 전부가 자국 생산품으로서, 순 수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북유롭, 폴투갈, 등, 유롭의 여러나라가 관광수입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 약 43만 여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매일 봉헌하는 미사 때 각국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가장 질이 뛰어나고 좋은 포도주는 폴투갈 파티마 지역 생산품이다. 그래서 파티마 성지를 순례하고 오는 신자들이 종종 자기네 본당 신부에게 최상의 선물로 파티마 미사주를 한병 사다 드리기도 하는데, 필자도 몇번 받아본 적이 있다. 파티마 성지 개척은 폴투갈 전역의 農,工,商,士의 전 분야를 조용히, 그러나 훌륭히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라시아대륙의 맨 서쪽 끝 한 쪽 귀퉁이에서 국제교통이 불편하던 이곳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몇 해 전에,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와 폴투갈의 파티마를 왕래하는, 국제선 항공이 리스보아 경유, 편도 1시간30여분 단시간의 여객기 항공편까지 개설하여, 필자도 몇 차례 이용한 적이 있었다.
천주교 성지나 대성당이 자리잡은 주위가 발전하는 데에는 천주교회 덕을 많이 보는 것이 사실이다. 비만 내리면 언덕 길이 너무나 질어서 고생하던 서울의 명동을 '진 고개'라고도 불렀는데, 명동 대성당 건립 이후, 날마다 수많은 천주교 신도들의 진출입로와 주변이 모두 포장되면서, 지금은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너무나 가난하던 조선 말에 마지막 박해로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남은 극소수의 신도들을 위하여, 일부 막 노동력 외에는 거의 100%의 명동성당 건립비를 프랑스 전국 성당에서 모금하여, 지금의 명동대성당을 세워준 프랑스 천주교회와 프랑스 신부님들에게, 한국교회와 한국 국민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수 십 차레 프랑스를 방문하면서, 1886년~1915년 동안, 조선의 서울 명동대성당 건립을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프랑스 전국의 모든 성당들을 찾아 다니며, 성금을 호소하는 강론활동을 하였고, 그 때 봉헌자들의 명부를 지금까지 보전하고 있음을, 경리 담당신부한테 듣고 감탄하였다. 보르도 벌판에서 밀,보리, 포도, 경작하는 농민들과, 알프스 산 자락의 리용 주변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며, 목축을 하던 교우들이 가장 많은 성금을 바쳤으며, 파리와 같은 대도시 시내에서 회사나 리스토랑을 하던 부유한 교우들의 성금은 빈약한 편이었다고 말하였다. 한 때 용인 도수리 공소 개울 건너(현재의 자연농원 앞) 앞고지(前垈里) 성당 신부로 선교하다가, 한국과 본국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서 경리담당을 수십년간 봉직하던 생전의 Fromanteau 신부님이 필자에게 점심식사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저녁 때까지 들려주던 이야기다.
-天主敎會 卞基榮 몬시뇰-
입력 : 2018.04.03 오후 10: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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